메뉴 건너뛰기

close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이미 살아있지 않으리라. 당신의 여인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노라.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혼은 당신과 함께 있노라."

- 전혜린의 일기 중에서


▲ 조용훈의 <요절>
ⓒ 효형출판
조용훈의 <요절>(효형출판 2002)은 그야말로 "불꽃 같은 광태의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안타까울만큼 짧은 삶을 살다간 사람들을 '요절'이라는 주제로 묶었다는 점도 특이하지만 그 대상을 화가로 한정지었다는 점 역시 독특하다.

조용훈은 프롤로그에서 "'요절'이란 단어에서 늘 피의 냄새를 맡는다"며 요절이야말로 "젊음만이 향유할 수 있는 황홀한 고통의 이니시에이션"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우리가 예술적 고뇌와 번민으로 얼룩진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방치했다고 비판한다. 고흐, 모딜리아니 등 외국 작가들에게만 향해져있는 시선을 내부로 수렴해오고자 하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과연 무엇이 이들을 요절, 혹은 단명케 하는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 여성의 이름으로, 나혜석
ⓒ 효형출판
이 책에는 모두 열두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자신의 예술 세계를 폭발시킨 화가이면서 단명할 것, 단 화력이 일천한 경우는 생존 연령보다 화가로서의 연령을 고려할 것,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로 기간을 제한할 것 등을 기준으로 추려낸 화가들이다.

저자는 이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주제별로 범주화하였다. '운명, 사랑을 만나다'에서는 '동양의 루오'로 칭송된 이중섭과 그의 일본인 아내 이남덕의 애절한 사랑과 곱추화가 손상기의 자학적인 사랑이 담겨있다.

'여성의 이름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여성으로 문학, 미술, 여성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나혜석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도전적이고 강렬한 색채만큼이나 대담한 삶을 살았던 최욱경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현실이 주인이다'에서는 남인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한 시대와의 불화를 회화적 통찰로 승화시킨 윤두서, 민중적 판화와 벽화로 80년대 미술을 주도한 오윤, "작업만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며 작업 중에 세상을 떠난 류인의 삶을 조명한다.

▲ 운명, 사랑을 만나다, 손상기
ⓒ 효형출판
'시가 그림을 완성했다'에서는 학문적 성취와 고결한 성정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인상, "30세에 얻은 것이 오백년을 당해낸다"는 극찬을 받았던 전기를 다룬다. 마지막 '한국화란 무엇인가'에서는 '한국의 로트렉'이라고 불린 구본웅, 허망하게 살해당한 천재 화가 이인성, 기이한 행동과 화려한 경력으로 유명했던 당대 최고의 화가 김종태가 그 주인공이다.

이 글의 강점은 저자의 문학과 그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화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저자는 그림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물론 많은 시와 역사 기록까지 곁들인다. 이를테면 80년대의 재야 미술가 오윤의 이야기에는 작품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송기원의 '사랑', 김수영의 '풀', 고은의 '어머니' 등의 시가 인용되고 그의 삶을 그려내기 위해 정희성의 시 '판화가 오윤을 생각하며' 등이 실렸다.

그가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참고한 자료의 목록만도 일곱페이지에 달한다. 저자는 그림과 문학, 그들을 둘러싼 역사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화가 개개인의 삶을 성의있게 조명한다. 그리고 그 서술의 밑바닥에는 저자의 화가와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깔려있다.

▲ 향토적 서정주의 화가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 효형출판
<요절>은 저자의 표현대로 "독선과 광기로 세계와 불화하며 자신의 시대를 접수하고 거침없이 예술에 순교했던 이 땅의 화가에 대한 헌사이며 비망록"이다. <요절>을 통해 우리는 잊혀진 화가들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화가들에 대한 비밀스런 이야기를 듣게된다.

그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독자들을 때로는 안타깝게, 마음아프게 혹은 시샘이 나도록 한다. 동시에 그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한층 좁혀준다.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그들 역시 삶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요절>은 열두 화가들의 거칠었던 삶을 쓰다듬어주는 최고의 헌사인 것이다.

▲ 류인의 <지각의 주>
ⓒ 효형출판

요절

조용훈 지음, 효형출판(200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