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공원
상하이〔上海〕에서 항일 유적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상하이시 북쪽에 있는 홍구공원(현 루쉰공원)이다. 이 공원은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추앙 받는 루쉰을 기념한 곳으로, 공원 내에는 루쉰의 묘와 루쉰기념관이, 공원 옆에는 루쉰이 말년에 보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오후 2시, 루쉰공원에 들어서자 우거진 숲에서는 우리 일행을 반기는 듯, 한낮의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공원 빈터에는 몇몇 사람들이 태극권으로 무아지경에 빠진 듯, 그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자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매원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걷자 윤봉길(尹奉吉) 의사 의거 표지석이 나타냈다.
1932년 4월 26일 윤봉길 의사는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을 찾아가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는 벽면 앞에서 선서문을 낭독했다.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 무참하게 마구 죽임)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국애인단 앞
그 날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백범 김구 선생과 나란히 태극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그 사진이 오늘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는 바, 우리가 길이길이 윤 의사를 우러러 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다. 죽음을 무릅쓴 출정에 앞서 의연히 사진까지 찍은 모습이 훗날 공개됨으로써 일제는 더욱 간담을 서늘케 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4월 27일에 네 편의 시를 남긴 바, 그 중 두 아들에게 보낸 시는 다음과 같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하여라.
동서양 역사를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 맹자의 본명)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이틀 후, 1932년 4월 29일이 거사 날이었다. 이 날의 모습을 <백범일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새벽에 윤 군과 같이 동포 김해산 집에 가서 최후로 식탁을 같이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윤 군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태연자약하다. 농부들이 들에 일하러 나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자던 입에 밥을 먹는 것을 보아도 할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윤 군의 밥을 먹는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다. 김해산 군은 윤 군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나에게 조용히 이런 권고를 한다.
“선생님, 지금 상하이서 우리의 활동이 있어야 민족적 체면을 보전하게 되는 이때에 윤 군을 구태여 다른 곳에 보내려 하십니까?”(거사를 앞두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백범 선생은 윤 의사를 동북지방으로 보낸다고 하였음)
나는 두루뭉수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모험사업은 실행자에게 전부 맡기는 것인즉, 윤 군 마음대로 어디서나 하겠지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나 봅시다.”
그러자 일곱 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나에게 주면서 내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 군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 있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나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 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을 향해 달려갔다.
윤봉길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천장절(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탄생일) 경축과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식장. 모든 참석자들이 빳빳이 선 채로 해군 군악대 주악에 맞춰 일본 국가 키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판단한 윤봉길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단상 한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다. 폭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가 단상 중앙에 떨어졌다.
곧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소리와 함께 일본 국가의 남은 꼬리도 폭음소리에 묻혀 버렸다.
숱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육군대장, 일본인 거류민단장 카와바다를 그 자리에서 절명케 했고, 일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을 중상케 했다.
일제의 관헌들은 곧장 윤 의사의 팔 다리는 붙잡았을지언정, 그의 입은 막지 못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그 부르짖음은 민족 항쟁의 태풍이요, 포효였다. 우리나라 독립 투쟁사에 길이 남을 ‘상하이사건’ ‘홍구공원 의거’ ‘4·29 분화(噴火)’로 일컬어지는 이 의거는 윤 의사의 살신성인으로 장엄하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당시 장개석(蔣介石)주석은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젊은이가 능히 했으니 장하다”고 격찬했다.
이 의거는 그 무렵 일제의 간악한 조·중 양 민족간의 이간책으로 꾸며낸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관개수로를 둘러싼 조·중 농민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사건) 때문에 악화되었던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을 일변시켜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 당국은 임시정부에 재정지원뿐 아니라, 중국 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에 한인 특별 훈련반을 설치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토록 했다.
나는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월홍교 부근 돌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쉬면서 지난날의 윤 의사 의거를 되새겼다. 나 같은 졸장부가 어찌 위인의 큰 뜻을 읽을 수 있으랴.
인공 호수 위에는 백조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