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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하면 우선 마초이즘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본디 의리는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뜻하는 말이다. 그 뜻은 유교사상의 변천과정에 투영돼 있다. 송대(宋代)에 비롯된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도의(道義)를 규명하는 학문으로 '의리'를 내세워 한(漢)·당(唐) 이후의 훈고학(訓뭍學)과 구별하였고, 인간의 기본 도리로써 오륜(五倫)이 강조되었다.
불교에서는 《사익경(思益經)》 역설품(力說品)에 "그 글의 의리를 따를 것이며 장구(章句)의 언사(言辭)를 따르지 말라"하였고, 성실론(成實論) 중법품(衆法品)에 "불법(佛法)은 모두 의리가 있지만 외도(外道)의 법은 의리가 없다"하여 의리를 불교의 교리로 해석하였다. 봉건·군주제도가 확립된 후에는 의리가 그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사상이 되어 군신(君臣) 사이의 의리, 부모에 대한 의리, 가족에 대한 의리 등이 강조되었다.
오늘날 의리의 의미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근래 의리는 '신의를 지켜야 할 교제상의 도리', 혹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체면' 등의 개념으로 변하였다. '저 사람은 의리가 있다' '의리상 얼굴은 내밀어야지' 하는 식의 말로 쓰이게 되었으며 특히 한국은 예로부터 관혼상제에서의 의리를 중히 여기어 상부상조의 미풍이 이 의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주당 정대철 대표의 굿모닝게이트 연루 건을 놓고 정치권에 새삼 의리론이 회자되고 있다. 과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대선자금 200억원을 언급한 정 대표의 물귀신작전이 정치적 의리를 저버린 것인지, 대선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아 대선 승리를 이끌고 당대표까지 맡은 사람에게 느닷없이 대표사퇴를 종용하는 것이 의리를 배신한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진정한 정치적 의리란 무엇인가. 대통령에 대한 도리가 우선인가, 당 차원의 대표 감싸기가 더 중요한 의리인가. 역시 모를 일이다.
모름지기 정치인이 새겨야 할 기본 도리는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국민에게 가장 크게 어필한 것은 바로 깨끗한 선거를 치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그에 고무된 국민들은 저마다 돼지저금통에 '믿음과 희망'을 담아 선거자금으로 쓰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의 약속이 당선 이후엔 슬그머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지 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하필, 아니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선대위원장이었던 민주당 정대철 대표의 입에서 최초로 대선자금 관련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정치적 의리와 신의의 문제든 진실과 거짓말의 문제든, 그 액수가 100억이든 200억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당 차원의 불법선거자금 모금과 지출내역을 모르고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건 선행을 베풀 때 하는 말이다. 선거와 선행은 엄연히 다르다. 따라서 선거를 치른 당사자가 밖에서 국민으로부터 모금한 돼지저금통 내역은 알고, 당에서 기업을 상대로 불법 모금한 자금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민주당의 노 대통령과 정 대표는 물론 한나라당 정치인들 모두는 이 대목에서 서로간의 이해타산에 따른 '의리론'으로 더 이상 국민을 조롱하지 말라. 언론에서조차 정치권의 '성역'으로 규정하고 있는 대선자금의 모금 및 지출내역에 대해 과감하게 공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국민에 대한 기본 도리를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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