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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길에서 우연히 아는 이를 만났다. 작년에 유치원의 PTA(학부모회의)에서 함께 임원으로 일을 했던 이였는데, 길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던 끝에 역시 위와 같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이는 빵을 아주 잘 만들었고, 그래서 그이의 ‘빵 만들기’와 나의 ‘김치 담그기’를 교환하여 서로 가르쳐 주기로 한 것이다.
요즘은 사실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새로 이런 일을 벌일만한 여력이 전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덜컥 약속을 하고 말았다. 객지에서 외로운 탓일까? 곧잘 사람들을 집에 불러들인다. 그리고 늘 어른과 아이가 뒤범벅이 된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먹고 떠들고 잔뜩 어질러 더 이상 어지를 것이 없을 즈음이 되어서야 파장을 한다. 딸아이도 나도 시끌벅적하던 끝의 고요가 너무도 싫어서 다시는 사람들 부르지 말자고 다짐을 하건만, 늘 같은 일의 반복이다.
약속한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내다가 날짜가 닥쳐서야 큰일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엔 밖으로 다니는 날이 많다보니 집안도 엉망이었고, 재료 준비에 점심식사 준비까지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이들은 주먹밥을 싸 가지고 오겠다고 했지만,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손님인데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비빔밥’을 준비하겠노라고 했다.‘본고장의 비빔밥’을 먹을 수 있겠다고 좋아하는 걸 보니 대충 만들기도 틀렸다 싶었다.
전날 장을 봐다가 저녁에 대충 준비를 해놓았다. 오이소박이 준비보다 비빔밥 준비가 더 일이 많았다. 먹기는 간단하지만 준비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택한 자신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일 아침, 아침식사 준비, 딸아이의 등원준비에 도시락 준비, 손님 치를 준비로 정신이 없는데, 남편이 어느새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리고 내가 부탁하지 않는 한 청소기를 드는 법이 없는데, 왠 일로 자진해서 그것도 출근 준비에 앞서 청소를 다 해준다. 게다가 “화장실도 청소해놨어. 내 할 일은 다 했지?”한다.
마누라의 행사에 협조도 해줄 줄 알고, 결혼 10주년을 앞두고 이제야 손발이 맞아 가나보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수확은 컸다.
그이를 비롯하여 3명이 우리 집으로 왔다. 이들도 같은 유치원에 보내는 엄마들인데 1기생(?)과는 천양지차로 한국과 한국음식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었다.
나의 어설픈‘오이소박이 강습회’가 시작된 건 작년 6월이었다. 그때도 유치원의 아는 엄마들을 중심으로 3명이 우리 집에 왔었다. 이른바 1기생인 이들은 어느 정도 국제적인 감각이 있다고 해야할 지, 외국인에게 그리 배타적이지 않은 이들이었다.
한국음식에도 관심이 많았고, 그 중 한 이는 단골로 다니는 한국식품점이 있을 정도였는데, ‘김치’는 물론이거니와 ‘장에 박은 깻잎’, ‘질경이 나물’ 같은 것을 사다가 먹을 정도였다.
그 1기생들은 그때 내게 배운 오시소박이 담그는 법을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현재 두 명이 영국과 오사카로 흩어졌는데, 나의 엉터리 오이소박이가 그 지역으로까지 퍼져갈까 내심 걱정이다.
그에 비해 2기생들은 고춧가루를 본 적이 없는 이를 비롯하여 한국의 고추장과 중국의 텐멘장의 구별이 안갈 정도로 기초가 없었다. 김치를 좋아해서 일본식 김치찌개도 끓여먹는다는데 이렇게 무지해서야 원….
먼저 10개씩 가져오게 한 오이를 씻어서 소금을 뿌려두었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맵게 무친 생채를 올리고, 갖은 나물과 볶음 고기를 얹은 후 참기름을 약간 떨구었다. 시어머님 특제의 매운 고추장으로 만든 양념장은 별도로 내었다.
먹기에 앞서 비비는 방법부터 가르쳐야했다. 벌겋게 될 때까지 썩썩 비벼야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한 입, 두 입 조심스럽게 맛을 보며‘맛있어요’를 연발하는데, 손은 연신 물컵과 국그릇으로 간다. "맵지 않느냐"고 물으니"맵지만 더운 여름에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중간중간 만드는 법을 물어 받아 적는다. 오늘 비빔밥 먹으러 간다니 남편이 꼭 배워오라고 했단다.
점심을 먹고 비빔밥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우리 집 앞에서 아이들을 내려주도록 모두 편지를 넣어 보냈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며 집으로 뛰어들었다. 작년 1기생이었던 이도 아이들과 함께 들어왔다. 이리하여 어른 다섯에 아이들 여덟이 좁은 집안에서 북적이게 되었다.
엄마들이 만들어 온 맛있는 빵으로 아이들의 간식을 준비해주고, 우리는 오이소박이를 담그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생강과 젓갈을 넣지 않는 내 식의 오이소박이다.
무우와 당근을 채 썰게 하고 나는 파를 다졌다. 내가 김치 담글 때 쓰는 커다란 스테인레스 그릇을 들고나오니 모두들 눈이 휘둥그러겼다. 그것을 씻어서 그 안에 채 썬 재료들과 파, 마늘, 고춧가루, 소금을 넣고 뻘겋게 버무렸다. 역시 눈이 휘둥그러지는 그이들. 간을 보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부추를 버무렸다. 그것을 십자로 갈라놓은 오이에 채워 넣는 시범을 보인 후 직접 해보도록 했다.
아이들은 온갖 장난감을 다 꺼내어 어질러놓더니, 다들 모여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2살 박이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여덟 명이 조용히 앉아있던 것도 잠시, 몇몇은 밖으로 나가 줄넘기와 자전거를 타는 모양이었고 몇몇은 집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그이들이 각자 가져온 그릇에 오이소박이를 담는 동안 보관요령 등을 설명했다. 1기생의 조언도 이어졌다. 고춧가루를 어디에서 구입할 수 있는지 등의 정보를 나누고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모두들 앉아서 음료와 과자를 먹으면서도 김치와 비빔밥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만드는 법에 대한 총정리와 함께 요령, 참고사항 등을 일러주었다.
이틀 후쯤 냉장고에 넣으라고 얘기했는데, 다음날부터 날씨가 몹시 더워졌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더니 한 이는 오이 위에 하얀 것이 조금 생겨서 걷어내고 냉장고에 넣었단다. 다른 이는 그 전에 넣어 두어 괜찮은 모양이었다. 참지 못하고 이미 먹기 시작했다면서 자꾸 먹고 싶다고 한다. 버릇이 들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떠는 그이가 밉지 않았다. 다음엔 자기가 비빔밥을 만들테니 먹으러 오란다.
그이의 비빔밥과 빵 만들기가 기다려진다. 서로 바쁘니 아마도 서늘한 가을이 되어야 날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