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정여립이 피신하여 자결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천반산과 마주하고 있어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가막리 천변 건너편에 천반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산정의 성터를 비롯해서 장군바위, 마당바위, 뜀바위, 깃대봉, 시험바위와 대섬에 등 정여립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조선 선조 때에 율곡 문하에서 수학한 개혁파 정여립은 보수파에 몰려 낙향한 뒤 대동계를 조직하고 민중을 규합해서 장차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고자 천반산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했다 한다. 매일 같이 깃대봉에 기를 꽂고 부하 장졸들이 뜀바위를 뛰어 넘지 못하면 넘을 때까지 강행하고 시험바위에서는 무예를 어느 정도 익혔는가 시험을 보았으며, 장졸을 마당바위에 모아 놓고, 정여립은 장군바위에 서서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정여립이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여 천반산에 들어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상소문이 있어 즉시 반역자 정여립을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밖의 일을 모르는 여립이 어느 날 밤 장군바위에 앉아 우연히 하늘에서 큰 별이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천문지리에 밝은 정여립은 순간 자기의 명운이 다 된 것을 짐작하고 길게 한숨을 쉰 뒤에 장졸들을 마당바위에 모아 놓고 “그간에 너희들이 배우고 익히고 갈고 닦은 전술과 전법과 힘은 머지 않아 나라에 환란이 밀어닥칠 때 나라를 구하는데 요긴하게 써먹을 것이다. 조정은 몽매한 무리들로 가득 차서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때가 오면 살신성충하라. 원통하고 분하다! 이제 너희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구나”하고는 장졸들과 눈물로 헤어졌다 한다.
며칠 후에 천반산의 기슭, 죽도에서 "정공을 모시러 왔다"는 진안 군수의 전갈을 받고 정여립은 장군바위에서 천지신명에게 "나라를 굽어 살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긴 뒤 자진 포박되어 억울한 모반으로 1589년 임지왜란이 나기 3년전에 한 많은 생을 마쳤다 한다.
가막리 지명유래
가막리(加幕里)란 한자 그대로 하면 장막이 겹겹이 앞을 막은 것 같은 첩첩산중이라고 한다. ‘가막’이라는 의미는 ‘검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막’은 ‘가마골’, ‘흑석골’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검다’란 ‘검’, ‘곰’은 ‘신(神)’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막리, 가막골이란 의미는 ‘신으로 섬기던 산의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한자로 가막(加幕)은 이런 의미를 무시한 채 한자화 된 것이다.
상가막은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마을에서 90살 드신 분도 잘 모른다고 한다. 특히 마을 안에 커다란 둥구나무가 있어 마을의 역사가 오래된 것은 틀림없으나 정확히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입향조도 어떤 성바지인지 정확하지 않다. 현재는 밀양 박씨, 경주 이씨, 경주 정씨 등 각성바지이다.
마을신앙
산신제는 10여 년 전에 끊겼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12시 넘어 닭이 울기 전에 모셨다. 산신제당은 마을 뒷산 감투봉 꽃날망 주령 밑 바위이다. 제주는 깨끗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산신제를 지낼 때 언제나 호랑이가 와서 앉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물은 명태, 막걸리, 밥 등을 장만하여 지냈는데, 밥은 산제당산에 가서 직접 했다.
제주는 목욕 재계를 하고 혼자 가서 제를 지내며 이 때 마을 사람은 아래서 풍물을 쳐준다. 그리고 제가 끝나면 마을 총회를 한다. 기우제도 마을 뒷산 감투봉 꼭대기에 3∼4명이 올라가 지낸다. 이 때 돼지 피를 뿌린다. 꽃날망에서 굿을 쳐준다. 이 날 하루는 마을 사람 모두가 일을 하지 않는다. 마을 길 건너편 경로당 뒤쪽에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수구막이 역할을 한다.
하가막 마을은 약 200여 년 전에 경주 정씨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현재도 14가구 중에서 경주 정씨가 8가구를 차지한다. 하가막에서 지내던 산제는 새마을사업 무렵에 없어졌다. 산제는 마을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가 몇 그루가 있는 곳에 바위로 제단을 만들어 모신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새벽에 모셔졌다. 깨끗한 사람을 제주로 정하고 동네 땅에서 나온 도조로 비용은 충당한다. 제주 혼자 가서 지내며 이 때 마을 사람들은 풍물을 쳐준다. 기우제는 부구산에서 지냈다.
장수군 천천면 신기 마을 당산제는 진안읍 가막리 (상·하가막)와 함께 모셨다. 신기 마을과 가막리는 가막천을 경계로 하여 진안군과 장수군으로 나누어지나 생활권 면에서 한 지역임을 말해주는 역할을 당산제가 담당했다.
신기마을 마을신앙
신기 마을은 피난지지(避難之地)라 일컫는 곳으로 약 100여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현재는 13호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안산은 천천 건너편 봉황대이며 마을 오른쪽 줄기 당산날에(콩알바위위)당집이 있는데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당산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 새벽 1시에 당집에서 모셨다. 당집은 너새기와로 정면과 측면이 1칸으로 아주 작은 규모이며 지금은 무너져 없고 당산날 느티나무 아래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당산제는 신기, 상·하가막마을 사람이 합동으로 모셨다. 제주는 애기를 낳거나 상을 당하지 않은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정해지며 제주로 정해지면 매일 목욕재계하고 제주집에는 금줄을 치고 향토 흙을 뿌린다.
비용은 마을 토지(400평)에서 나온 것으로 충당하며 제물 중 밥은 제를 지낼 때 당산에서 직접 지었다. 제주는 혼자 제를 지내며 제를 도와주기 위해 제주 아들이 동행하기도 하였다. 축문을 읽고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한 소지를 올린다. 다음날 대동회를 겸하는데, 이 때 동네규칙을 정한다든지 품삯을 정한다고 한다.
정여립의 전설을 품고 사는 가막리의 인정 많은 아저씨, 아주머니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