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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살면서도 고향 땅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추억의 길'들 중에서 오늘 다시 걸어보는 일이 쉽지 않은 길도 많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세월의 길이 만큼 내게는 고향 땅에 추억의 길도 많다. 고향 땅 그 추억의 길들을 다시 걸어보지 못 하며 하릴없이 사는 그 맹랑한 시간의 길이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백화산에 오를 때마다 그것을 느끼곤 한다. 눈 아래 펼쳐지는 사면 팔방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내 추억의 길들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거나 감추고 있음을 보곤 한다. 오늘 그 길을 다시 걸어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옛날의 추억들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한숨을 짓기도 한다. 때로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아릿해지기도 하는 미묘한 통증 때문에 눈물이 핑 도는 경우도 있다.

백화산에서 보는 옛날 내 추억의 길들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길은 '장명수'라는 바다로 가는 길이다. 장명수에는 태안 읍내의 남쪽 변두리 마을인 '환동' 너머 '구실' 마을을 거쳐서 가는 길이 있고, '아맹이고개' 넘어 남산리를 거쳐서 가는 찻길이 있지만, 내 추억의 길은 찻길이 아닌 산모롱이 길이다.

장명수는 태안 읍내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다. 옛날에는 가장 가까운 바다가 아니었지만, 일제 시대 이후로는 가장 손쉽게 갈 수 있는 바다가 되었다. 육지로 움푹 파고 들어온 바다 제방의 이쪽 너머에는 갈대밭이 있고, 그 너머에는 갯물 저수지와 넓은 염전이 있다. 또 염전 너머에는 논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논들의 한 옆으로는 세 개의 산모롱이가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동무하고 있다.

태안 읍내에서 장명수까지는 시오리 길이다. 백화산에서는 좀더 먼길일 것이다. 하지만 시계가 좋은 날은 그 시오리 길도, 장명수의 갯벌도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비 온 뒤 세상도 사람의 눈도 다 맑아진 날 보면 바둑판 같은 염전의 좁고 낮은 둑들도 보이고, 장명수 갯바닥의 조약돌까지 보일 것만 같다.

지금은 환동 너머 구실까지 찻길이 나 있지만, 옛날에는 환동이나 탑골에서부터 산길을 타고 넘어야 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환동과 탑골 사이의 산길을 넘어간 다음 구실에서부터 세 개의 산모롱이 길을 차례로 지나면 염전이 나오면서 갯내음이 확 풍겨오는데, 처음 갯내음을 맡을 때마다 내 가슴엔 어떤 긴장과 설렘이 가득 차곤 했다.

내가 장명수 시오리 길을 가장 많이 다닌 때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1년 뒤로 미루고 집에서 놀던 시절이다. 누님이 중학교엘 다니고 있어서, 한꺼번에 중학생 둘을 가르칠 수 없는 우리 집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일년을 놀았는데, 그때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누님이 학교에서 빌려오는 책을 읽는 일, 우리 집 양계장의 닭들에게 삶아줄 개구리를 잡는 일, 그리고 망둥이 낚싯대를 메고 장명수를 다니는 일이었다.

망둥이 낚싯대를 메고 장명수를 다니는 일은 내가 가장 즐긴, 참으로 재미나는 일이었다. 햇볕 따가운 날 모자도 쓰지 않고 시오리 길을 가면서도 더운 줄을 몰랐다. 어서 낚시질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저 걸음을 재촉하기만 했다.

내게 처음 망둥이 낚싯대를 마련해 준 이는 큰아버지였다. 정미소를 운영하신 큰아버지가 집에서 물이 담긴 큰 양동이에다 낚시를 넣고 망둥이 잡는 요령을 알려주셨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가 그 시절 장명수에서 망둥이를 주로 잡은 곳은 바다가 아닌 염전용 갯물 저수지였다. 직사각형 저수지의 둑을 타고 맑은 물 속을 보며 천천히 걷다 보면 저수지 가장자리 물 속에 있는 망둥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망둥이를 발견할 때의 가슴 두근두근하는 긴장감이란…!

미끼로 조갯살을 끼운 낚시를 망둥이 가까이 물 속에다 넣고 낚싯대를 조금씩 까딱거리면 그 망둥이가 금세 다가와서 덥석 물었다. 망둥이가 낚시를 문 순간, 그리고 망둥이의 입질이 낚싯대를 타고 내 손에 전해지는 순간 나는 힘껏 낚싯대를 채어 올렸다. 망둥이가 물 밖으로 끌려나올 때의 순간적인 진동, 낚시에 매달린 망둥이가 물 밖에서 지느러미를 활짝 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상쾌한 쾌감으로 심호흡을 하곤 했다.

이렇게 나는 처음에는 망둥이를 눈으로 보면서 잡았다. 처음에는 망둥이를 그런 식으로 잡는 줄 만 알았는데, 나중에는 망둥이를 보지 않고 잡는 낚시가 더 재미있고 그게 진짜 낚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잡은 망둥이를 주전자에 담곤 했다. 작은 어린이 체구에는 다래끼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낚시하러 가는 내 손에 매번 작은 주전자를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주전자에 담아온 망둥이를 달아서 손수 찌개를 끓이시곤 했다. 얼큰한 망둥이 찌개를 상에 올려놓고 막걸리를 잡숫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막걸리와 함께 망둥이 찌개를 맛있게 잡숫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어린 가슴은 얼마나 흐뭇했던지….

가족과 함께 맛있는 망둥이 찌개를 먹으면서 내가 큰일을 한 것만 같은 대견스러움에 괜히 가슴을 헤벌리곤 했는데, 그 풍경도 어느덧 40년이 훨씬 지난 저 먼 세월 밖에서 뉘엿뉘엿 가물거리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백화산에서 장명수 길을 보며 그리운 상념에 젖다 보면 고등학생 시절의 가슴 아릿한 사연 하나도 절로 떠오르곤 한다.

고등학교 몇 학년 때 일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해 가을 밤 꼭두새벽에 이기목이라는 동네 친구 한 명과 함께 지게를 지고 장명수 시오리 길을 간 적이 있었다. 장명수 바다 근처 근흥면 안기리의 한 동네로 가서 어떤 한 집에서 볏가마니를 몰래 져내는 일을 했다. 그 집에서 좀 떨어진 한길가로 볏가마니를 져 나르는 일이었다. 몇 가마니나 져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밤중인 꼭두새벽에 그 집에 가서 볏가마니를 조심조심 소리나지 않게 져 나른 사연은 환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내 아버지는 곡물 장사를 하고 있었다. 농촌을 다니며 농가들에 미리 돈을 주고 곡식을 사다가 도정을 해서 도매업자에게 넘기는 이문이 박한 장사였는데, 때로는 돈을 받아쓰기만 하고 제때에 곡식을 내놓지 않는 농가들도 있었다. 불량한 마음으로, 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수확기가 여러 번 지나도록 눈을 질끈 감고 사는 농가들도 있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우리 집은 밑천이 없었다. 도매업자의 돈을 얻어다가, 말하자면 심부름을 하는 형태로 장사를 하니, 어느 한 집에 오래 곡식 값이 잠기는 것은 우리의 명줄을 압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너무도 어려운 사정 탓에 한 번은 어머니가 근흥면 안기리의 한 농가에 가서 눈물로 호소를 한 모양이었다. 아녀자의 눈물바람이 너무 측은하고 미안했던지 그 농가 주인은 드디어 몇 년 전에 쓴 돈의 값어치만큼 벼를 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볏가마니를 훤한 대낮에 이보란 듯이 내놓을 수는 없노라고 했다. 이웃들에게 진 빚이 많아서 남의 이목을 피해 몰래 볏가마니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빛이 조금 있는 꼭두새벽에 그 집에 가서 그 집의 볏가마니를 몰래 져내는 일은 그만큼 긴장감도 컸다. 뜻밖의 다른 사단이 생기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하는 마음이었다. 일을 마친 동네 친구 기목이에게 품값을 주어 먼저 보내고, 어머니와 나는 그 한길 가에 남아서 이슬을 맞으며 날이 밝을 때까지 볏가마니들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는 이른 아침에 아버지가 보낸 말 달구지에 볏가마니들을 싣고 그곳을 떠나올 때서야 나는 푸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는 백화산에서 장명수를 바라볼 때마다 근흥면 안기리의 그 동네 쪽에도 눈을 주곤 한다. 40년 전 그때의 그 집이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집의 위치도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다.

그 집이 지금도 그 동네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 어머니의 눈물바람에 미리 돈 산 곡식을 몇 년 만에, 그것도 아무도 보지 않는 한밤중에 몰래 내주었던 그 집의 주인 어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생각하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그 분이 이웃들에게 진 빚은 그 후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처럼 장명수 길은 내게 아릿한 사연과 함께 깊은 정감을 주는 추억의 길이다. 그런 그 길을 나는 참으로 오래 걷지 못하였다. 환동 너머 구실까지는, 그리고 남산리 끄트머리인 염전 근처까지는 옛날에 차로 가본 적이 두어 번 있지만, 찻길이 아닌 세 개의 산모롱이 길은 그러고 보니 벌써 30년도 넘게 다시 밟아보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은 오후에 백화산을 오르지 않을 생각이다. 이 글을 쓰고 나서도 다시 장명수 길을 밟지 않는다는 것은 왠지 옳은 일이 아닐 것만 같다. 오늘은 추억의 장명수, 그 시오리 길을 내 두 발로 걸어볼 생각이다. 슬프고 아릿하기도 한 갖가지 상념들을 감미롭게 끌어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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