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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에서
김포공항에서 ⓒ 박태신
제주도에 가는 길입니다. 김포공항 대합실에서 우리가 탈 비행기를 창 밖으로 내다봅니다. 탑승 전의 긴장감을 즐깁니다. 덩치 큰 비행기가 날렵한 몸매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위로 곧게 솟은 뒷날개가 날카로운 기상을, 통통한 몸짓이 넉넉한 품을, 비스듬하게 위로 치켜진 양 날개가 준비된 긴장감을 나타냅니다. 대합실의 통유리창은 이런 비행기의 모습을 날것으로 보게 해주었습니다. 의자에 앉은 이들은 자신을 태울 이 20세기 문명의 상징을 나름대로의 상상력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바람을 담은 집'이라는 책에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는 젊은 시절 처음 비행기를 타고 유학을 가는 경험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파리는 기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문득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버려진 미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비행기라는 교통수단 이외에는 완전히 길이 끊어져버린 공간 속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이 전에는 한번도 맛보지 못한 두려움과 고독감의 벽 앞에 나를 세워놓았다. 이제는 땅을 밟고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나는 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땅을 밟고는 돌아갈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지은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행기는 미지의 세계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주 빠르게 데려다 주는 아주 두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운전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면서 창 밖의 세계를 아주 높은 곳에서 보고 확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합니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우리가 한눈에 보지 못하는 넓은 세계를 보여줍니다. 도시 전체를 보여주더니 이내 산과 바다가 있는 곳으로 옮겨놓는 그 속도를 마음대로 늦출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겠지요.

비행기에 대해서는 쌩 떽쥐베리의 말도 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대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기구는 우리로 하여금 땅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다. … 비행기로써 우리는 직선을 배웠다. 이륙하자마자 우리는 물 먹이는 곳이나 외양간으로 기울어지는 길들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구부러져 가는 길들을 버렸다. … 비행기의 창을 통하여 인간을 관찰하면서 우주의 척도로써 인간을 판단하게 된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우리 나라 국토.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충청도 어디쯤이라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우리 나라 국토.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충청도 어디쯤이라고 했다. ⓒ 박태신
길 위로만 가다가 못 보던 것들을, 숨겨진 것들을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은 남습니다. 너무 날 것으로 보다가 체해 버릴 것 같아서요. 길 위와 하늘 위 둘 다 진실된 모습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중간쯤 위치하는, 경계선 상의 모습을 비행기 창을 통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표현이며 비겁함이고 몽상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창 밖으로 구름이 대지처럼 펼쳐져 있고,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첩첩산중의 마을과 길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 낯설어서 잠시 혼을 빼앗길 것 같았습니다. 두껍고도 작은 비행기의 창은 아주 폐쇄적인 창입니다.

하늘에서 항공기의 창은 열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대기상의 상태가 그런 상태를 규정합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단번에 확인할 수 있으면서 여전히 거리가 먼 낯선 곳이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땅인데도 말입니다.


구름나라
구름나라 ⓒ 박태신
<구름나라>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한 아이가 구름나라에 잠시 머물면서 환상적인 경험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구름은 나에게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면서 나를 규정해 주는 친근한 조물(造物)입니다. 그런 조물 위를 둥둥 떠다닐 때의 느낌은 정말 뭐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마치 분명한 현실이지만 환상, 공상, 동화의 세계와도 같은 현실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즉, 비행기는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고 있는 지역을 날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는 몽상과 어울리는 현대의 멋진 인공물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전에 항공기 재난을 다루는 영화를 자주 보았습니다. 공중의 한정된 공간에서 닥친 위험을 해결해나가는 장면을 스릴 있게 보곤 했습니다. 대합실에서 본 항공기의 앞창 안, 그러니까 조종실은 그런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됩니다. 민간인이 항공기를 착륙시키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묘사하곤 하지요.

조종사들에게 창은 자유로운 시야의 제공자입니다. 조종사는 비행기가 어디를 가고 있고 어느 상공에 있고 어디로 이착륙하는지를 알고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조종사들이야말로 꿈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온전히 오고가는 중간자입니다.

이동성을 지닌 운송수단의 창은 제자리에 머물러 전후좌우 운동밖에 할 수 없는 창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동하는 창들은 세상을 증언하는 창들입니다. 창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확인하게 하면서 서로 소통하게 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입니다. 제주공항에서 탄 비행기는 김포공항에서 탄 것보다 작은 중형이었습니다. 활주로를 한참이나 천천히 굴러갑니다. 덕분에 넓은 할주로를 창 밖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 창을 통해 바라본 남해. 제주도에서 떠난 지 얼마 안돼서 찍었다. 제주공항에서 이륙할 때 멀어져 가는 제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비행기 창을 통해 바라본 제주 공항과 시내, 한라산 그리고 섬 전체는 낙원 같은 모습이었다.
비행기 창을 통해 바라본 남해. 제주도에서 떠난 지 얼마 안돼서 찍었다. 제주공항에서 이륙할 때 멀어져 가는 제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비행기 창을 통해 바라본 제주 공항과 시내, 한라산 그리고 섬 전체는 낙원 같은 모습이었다. ⓒ 박태신
비행기가 이륙하고서 곧바로 급상승합니다. 저 아래 제주시가 저만치 물러갑니다. 도시가 작아지더니 이내 숲이 보이고 얼마 안 있어 바다가 보입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모두 창이 부린 요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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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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