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기본적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의 나라였다. 즉 고려시대의 국교였던 불교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생각으로 나라의 근간을 유교에서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절들은 1/100로 줄었으며,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고, 스님들은 행보도 부자유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일부 임금은 여전히 불교에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흔적이 바로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산 14-1의 회암사이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고,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國刹:나라의 절)이었다고 한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물론 불사(佛事:불가에서 행하는 모든 일)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여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함께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면서 200여 년 동안 번창했던 회암사는 빈집이 되어 버렸다.
회암사에는 불타 없어진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물론 곳곳에서 발견되는 불상들은 목이 잘린 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담장이나 축대 위에 많은 양의 도자기가 무더기로 깨진 채 버려져 있는데 이는 유생들의 반발에 의해 의도적으로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번창할 때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殿閣:큰집)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모셔진 불상도 15척(尺:길이의 단위로 30.303cm이며, ‘치’의 10배, 따라서 15척이면 4m55cm 정도)짜리가 7개나 있었다고 하며, 관음상(觀音像:관세음보살의 상)도 10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절로 이런 정도의 규모는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회암사는 절의 크기만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도 참 많다. 회암사가 빈대가 많아 불을 태운 탓으로 없어졌다고도 하며,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소실됐다고도 한다. 절의 크기에 대한 이야기는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정도였다고 하며, 사람이 너무 많아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큰 탓에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였고,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대부분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회암사터의 면적을 대략 만여 평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신라의 대찰 황룡사지가 약 9천여 평인 것을 보면 어마어마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이 회암사는 2000년 12월 9일에 KBS 역사스페셜에 “이성계의 또다른 왕궁, 회암사”란 제목으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회암사는 폐허가 된 후 절터에 석벽(石壁:돌로 쌓은 벽이나 담)과 기단(基壇: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계체석(階?石: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등 일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64년 국가지정 사적 제 128호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을 하고, 경기도 박물관에서 장기적인 조사, 발굴 작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60% 정도를 발굴했다고 한다.
그런던 중 이번에 경기도박물관에서는 “묻혀있던 조선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불교문화전” 특별전시회를 갖는다. 기간은 2003년 7월 25일(금)부터 2003년 10월 5일(일)까지이며, 장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번지에 있는 경기도박물관이다.
이 전시회의 주제는 “회암사지 관련 유물을 통해 본 고려말 조선전기의 불교문화"이며, 회암사 절터에서 발굴된 출토 유물 및 관련 문화재 등 250여 점을 전시하고, 개막기념공연(영산재), 학술강연회, 회암사지 발굴현장 답사 등의 부대행사를 갖는다.
전시되는 품목은 ‘지공화상 관련 유물’ 6점, ‘나옹화상 관련 유물’ 8점, ‘무학대사 관련 유물’ 5점, ‘조선전기 왕실 관련 유물’ 5점 및 기타 회암사 관련 유물 및 출토 유물 230여 점 등 약 250여종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되는 출토 유물 및 관련 문화재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금탁’, ‘정청 출토 청기와’, ‘도자기(백자)’, ‘도자기(분청향완)’ 등이 있다.
그중 지름이 30cm나 되는 ‘청동금탁’이란 풍경(風磬: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속에는 붕어 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남)은 보광전 추녀 모서리에 걸려 있던 것으로 134자의 명문(銘文:돌, 쇠붙이, 그릇 등에 새겨진 글)이 새겨져 있었다.
명문에는 “회암사(檜巖寺)”란 절 이름이 들어있어 문헌에서만 있었던 절 이름을 구체적인 자료로 증명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태조, 현비, 세자(방석), 왕사 묘엄존자(무학)”의 이름도 같이 들어 있어 태조와 무학대사, 회암사의 관계를 증명해주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고 하겠다.
또 ‘정청 출토 청기와’는 회암사 절터 8단지 정청 부근에서만 여러 점 출토되었다. 이는 왕실의 원찰(願刹:소원을 빌거나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었던 봉선사나 경복궁에서도 청기와가 출토된 바 있어 정청이 왕실과 관련한 세속적인 기능을 했던 곳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도자기는 회암사지 발굴 출토품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인데, 조선 백자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분청사기가 많다. 백자 중에는 "天", "地", “玄”, "黃", "別", "左", "右" 등 명문을 새긴 상품의 백자조각이 일정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조각들은 왕실에 자기를 공급하던 경기도 광주 중앙관요에서 만든 것으로, 회암사와 왕실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전시되는 것 중 일반 절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분청 향완(香椀:제사 때에 향을 담는 사발), 백자 동자상(童子像), 송자-가채(宋瓷加彩:세 가지 빛깔로 된 그림을 넣은 자기) 대좌(臺座:불상을 올려놓는 대) 등이 있어 주목된다.
또 여기엔 잡상(雜像)이 있는데 궁궐 지붕의 추녀마루 부분에 올라가는 조형물로, 지금까지 절에서 발굴된 예로는 강화의 선원사지가 있을 뿐이다. 회암사터에서 출토된 잡상은 출토량이 많고, 지금까지 발굴된 잡상과 비교했을 때 종류와 형식이 다양하다는 점에 매우 큰 특징이 있다.
이외에도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시문집 ‘목은집(牧隱集,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이 전시된다. 이 시문집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중수기'는 회암사의 모습을 전체적이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회암사를 복원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기간 중 주요행사는 지난 7월 25일의 ‘개막기념공연’과 7월 29일의 “고려말 조선전기의 불교문화와 회암사”란 주제의 학술 강연회가 있었고, 회암사터 발굴현장 답사, 전시기간 중 문화행사 등이 있을 예정이다.
이 중 회암사터 발굴현장 답사는 8월 31일(일)과 9월 28일(일)에 있을 예정이며, 문화행사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공연으로 고양 송포 호미걸이 놀이가 7월 27일에 있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줄타기(8월 2일), 경기도당굿(9월 28일) 공연과 해설이 있는 우리춤 공연(8월 31일), 특선영화 상영(8월 2일부터 8월 17일까지)이 있을 예정이다.
전시장인 경기도 박물관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있는데 경부고속도로 수원 나들목 옆 신갈오거리에서 민속촌방향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서울에서는 다양한 버스편이 있다. 우선 강남역에서 1560번 좌석버스를 타면 박물관 정문에서 내릴 수 있어 찾기가 편하다. 서초동 남부터미널에선 신갈행 시외버스, 좌석버스 5100-1, 5200가 있고, 동서울터미널에서는 용인행 시외버스, 강남역은 좌석버스 1560, 5001-1, 5001, 5100, 잠실역은 좌석버스 1001, 5600, 일반버스 1116, 사당역에서는 좌석버스 5005, 7007 등을 타고 각각 시외버스터미날이나 신갈정류장, 축협 앞 등에서 내려 찾아가면 된다.
자세한 문의는 유물관리부 전화 031-288-5380~9로 하면 되고, 인터넷으로 확인하려면 경기도 박물관 누리집(www.musenet.or.kr)이나 회암사 발굴조사자료 누리집인 http://www.hoeamsa.co.kr/index.asp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보면 된다.
오랜 세월동안 흙 속에 묻혀있던 회암사터는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고려말부터 조선까지 역사의 큰 굴곡을 겪은 회암사는 지금은 이전의 토대들만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이야기는 그 속에서 하나둘씩 나오는 유물들을 가지고 우리가 상상해야 할 몫이다. 자 이번 여름엔 그 묻혔던 역사를 찾는데 우리도 한번 확인하러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