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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의 신보수주의 경향이 득세하면서 지난해부터 유럽과 미국에 불어 닥쳤던 ‘신보수주의’정체에 대한 논쟁은 이라크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때 ‘칸트의 유럽’과 ‘홉스의 미국’이라는 대립의 칼날을 세우며 미국은 유럽적 세계관과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라크과의 전쟁을 소리 높여 외친 사람이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선임 연구원인 케이건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조지 슐츠 국무장관의 연설문 작성자로 워싱턴에 입성한 이후 미국의 신보수주의 이념의 전도사로 그 명성을 날리는 논객이다.
그는 유럽인들은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가 꿈꿨던 ‘영구평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미국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세상을 보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케이건의 논지는 세계 질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칸트적 영구 평화’라는 환상 세계에 젖어 있는 유럽적 딴지걸기를 의식하지 말고 이라크와 같은 악의 세력, 무법자들을 침공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케이건이 보여주는 신보수주의적 신념은 미국이 추구하는 이익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국익이 아니고, 고도의 도덕성에 바탕한 보편적 국익이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은 미국은 물론 세계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2002년 8월 2일자 '노트북을 열며'(배명복) 참고
이젠 이라크과의 전쟁은 끝났다. 그 전쟁 이후에 미국의 신보수주의적 물결이 휩쓸고 있는 와중에도 유럽과 미국의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각종의 '음모론’이라는 유령과 같은 정체불명의 잔존물들이 떠돌고 있다.
신보수주의 한 가운데 조지 부시가 우뚝 서있고, 그 주변에 어른거리는 신 보수주의자들의 정치 철학적 이론을 심어준 철학자로서 독일의 유태인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1973)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 추종자들은 이라크과의 전쟁이 끝난 이래로 ‘일단의 신-보수주의적 음모자들'로 불린다.
그들은 부시 행정부를 이끄는 작은 엘리트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연방 최고 법원의 재판관에서 찾아지고, 백악관과 국무성에도 근무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특정한 사고방식을 스트라우스로부터 배웠지만, 그들은 선생보다 더 권력 의식적이다. 그들은 미국을 단지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기를 원하는 엘리트 집단들이다.
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는 누구인가?
미국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른 철학자는 독일의 좌파 철학자가 아니라, 틀림없는 보수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테오도르 W 아도르노와 최근에 그의 유해가 코네티컷 뉴 헤븐에서 베를린으로 옮겨간 허버트 마르쿠제와 동시대인으로, 이 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창시자와 달리 상대적으로 독일 지성인들에게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트라우스 역시 유태인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인생의 나머지를 미국에서 지냈다. 올 가을에는 그의 죽음의 30번째 기일을 맞이한다.
독일 헤센의 키르히하인에서 태어난 그는 서양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부터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홉스,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두루 폭넓게 공부한 정치 철학자이다. 그의 정치 철학자로서의 명성은 한나 아렌트, 한스 요나스에 버금간다.
그는 ‘이성’이 도덕적 삶과 정치적 삶을 위한 필요한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믿었다. 필요한 것은 악한 자를 처벌하고 정의로운 자는 보상을 해주는 초월적 ‘신’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 철학자들은 이 ‘신앙’을 굳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근대의 철학자들은 합리적 자기 이익이 사회적 생활의 충분한 근거라고 생각함으로써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 ‘이성에 대한 신뢰’가 ‘서구의 위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오히려 신앙을 파괴시키고 ‘야만주의’에로의 문을 열어 젖힌다. 또한 그는 이성과 철학은 국가를 부패시키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철학자들이 박해를 피할 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또 국가의 행복을 위해서 철학은 숨겨져야만 하고 비밀스러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철학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강의되어야 한다는 'esotericism'이다. 이것은 대중을 위한 강의인 'exotericism'과 대립된다.
이 에소테리시즘의 원리에 따라 모든 위대한 저작은 양면성을 가지는 것이므로, 대중을 가르치는 측면과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한 위험한 진리를 내포한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 어긋나게 플라톤의 참된 대변자자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정의는 보다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말했던 트라시마코스라고 해석한다.
결국 플라톤의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역할은 대중을 가르치기 위해 등장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보다 약한 논변을 보다 낫게 만드는 그 능력, 즉 소피스트적 기술만을 보여주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나아가 그는 ‘진리’란 국가의 꼭 필요한 신화와 환영 배후에 있는 진실을 갈망하는 소수에게만 의미 있는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진리는 모호하고 더러운 것이지만, 여전히 철학자들의 물음의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에소테리시즘에 직면한 ‘스트라우스의 추종자들’은 미국의 자유주의를 근대성의 유산의 구현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따르는 무리들을 위험한 자들로 보았다. 결국 스트라우스의 추종자들의 목적은 이러한 근대성으로부터 미국을 구하는 것이었다.
(아래 부분은 독일 <슈피겔(DER SPIEGEL)>지 2003년 8월 4일자에 실린 GERHARD SPORL의 글 'Die Leo-Konservative'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편집자 주)
스트라우스의 추종자들은 누구인가?
매년 있어왔던 것처럼 스트라우스 추종자들의 워싱턴 지부는 지난 7월 워싱턴 공원에서 야구를 하고 과거와 현재에 관해서 잡담을 즐기는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그 파티에 행정부 안팎 집단의 60명 이상이 그 모임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 모임의 참석자들은 프란시스 후쿠야마와 함께 책을 저술한 국무성의 정보 전문가 아브람 슐스키, 부시 정부의 대표적 매파적 인물인 폴 울포위츠(Paul Wolfowitz) 국방부 부장관, 워싱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잡지인 '더 위클리 스탠더드(the "Weekly Standard")'의 편집인인 윌리엄 크리스톨, 대통령에게서 줄기 세포 연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밝히라는 임무가 주어졌던 레온 카스 등이 거기에 있었다. 이들도 역시 레오 스트라우스의 ‘학생들’이다.
이들, 즉 스트라우스의 파벌은 권력의 두 번째 서열의 일부이지만, 그들이 가진 21세기에 미국이 수행해야 할 특별한 이데올로기는 도날드 럼스펠트, 딕 체니, 부시의 정치적 행위의 철학적 토대가 된다. 월포위츠를 비롯한 다른 스트라우스 추종자들은 본질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적 사상을 경멸하는 보수적 혁명의 아방가르드의 일부이다.
미국에서의 스트라우스의 철학 활동
1921년에 에른스트 캇실러(E. Cassirer)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는 곧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주도적 철학이었던 신-칸트주의를 거부했다. 또 그는 과학적 판단의 가치중립성의 믿음을 주장하는 막스 베버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마르쿠제, 칼 뢰비트와 균터 안더스, 마틴 하이데거와 교제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스트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자유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위협으로부터 극단적인 결과들을 이끌어낸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와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계몽주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미래의 정부적-사회적 질서로서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타당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이성에 대한 불신과 ‘신앙’이 주는 내적인 결속력 없이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본 스트라우스는, 종교는 안정된 사회 질서 가운데 결속하는 수행자로서 기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지만, 또한 필수불가결한 아편으로 허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가지게 된다.
스트라우스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결국에는 살아나갈 수 없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시민들에게 어떤 종교적-도덕적 기반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적 믿음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진리를 조정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권유했던 것처럼, 그들은 '경건한 거짓말들'에로 도피처를 삼을 수 있고, 진리에 대한 선택적 사용에 도피처를 삼을 수도 있다.
스트라우스가 오늘의 미국에서 대중 조작의 방법을 연구하기 위하여 나치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비난받는 것은 정확히 그의 삶 내내 자신이 내세웠던 정치 이론의 이 근본적인 요소들 때문이다.
월포위츠와 같은 스트라우스 추종자들과 이라크 전쟁의 다른 옹호자들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단순히 그의 정치적 원리들을 사용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담 후세인에 맞선 전쟁에서의 ‘부분적인 허구적 근거(이유)들’은 독일에서 온 이민자의 철학적 유산을 드러내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음모론’이라는 것은 스트라우스가 꼭두각시 선생으로서 묘사된 곳과 부시 행정부가 그의 꼭두각시들로서 묘사된 곳에서 발전되어 나간다. 이 이론의 반 유태적 함축과 스트라우스를 ‘나치 유태인’으로서 보는 것은 이점에서 분명해진다. 특히 그의 학생들의 다수가 유태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폴 월포위츠, 아브람 슐스키, 하베이 맨스필드, 윌리엄 크리스톨.
‘미국에 보내진 히틀러의 선물'이란 자조적 별칭으로 자신들을 불렀던 유태인 학자들 속에 끼여 스트라우스도 1938년에 미국에 건너와 1948년부터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시카고는 오늘날 보다 더 유명한 대학이었다.
록펠러 재단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던 시카고 대학은 엘리트들을 배출함으로써 엄청난 영향력을 전 미국에 발휘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카고 대학에서 엘리트들을 가르친 세 사람의 교수들은 스트라우스, 모겐타우(Hans J. Morgenthau), 프리드만이었다.
모겐타우의 가르침을 잘 따르던 학생이 닉슨 대통령 시절에 국가 안전 고문과 국무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였다. 그의 실제적 정치학의 입장은 전제군주든 독재자이든 간에 불구하고 상호 공존이 이익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은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프리드만은 존슨으로부터 닉슨을 거쳐 레이건에 걸쳐서 대통령에게 자문해주는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국가는 시장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것이 공급측면의 경제 정책이론으로 이끌고, 자본주의는 세금 감면의 결과로서 이윤과 소비가 증가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가적 적자를 만들어 내었던 이 모험적 경제 정책이 다시 현재의 공직에 있는 대통령에 의해서 채택되었고, 역시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현실에 대한 감각과 권력과의 교섭에 대한 능력도 없었던 레오 스트라우스가 오히려 죽은 후에 미국의 정치와 정치가들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그는 결코 세상의 일들이 더 나은 것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시종 회의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정말로 하고자 했던 것은 그의 학생들을 고대인의 철학 세계로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그는 끝없이 인간과 국가에 관련해서 정의란 무엇인가,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어떤 차이가 국가를 만드는가? 우리의 인식의 한계는 어디인가? 와 같은 철학적 물음을 묻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물음 자체를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다. 과거의 위대한 저작 속에서 그 문제들은 순수한 문화의 견지에서 말을 건넬 뿐이다. 스트라우스는 그 문제들을 고려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이는 그 문제들이 풀어질 수 있을 것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학생들의 몇몇은 행동을 취하는 것이 보다 큰 추진력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행동을 위해서 이해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유럽적인 이론에서 미국에서의 실천적 적용으로 나아가려 했다.
미국에는 신보수주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미국에서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기원적 요소는 문화적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에서 찾아진다. 좌파는 사적인 영역은 정치적이라고 선전했다. 이 말을 받아 신보수주의자들은 밀턴 프리드만에 좇아서 ‘국가는 경제 바깥에 있어야만 하지만, 그 시민들의 침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미국에서의 가장 큰 싸움은 낙태와 사형형벌제도, 동성애 혹은 혼전 섹스에 관한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적 정신으로 무장한 신보수주의자들은 시대의 풍조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해 늘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 자유주의의 허용 정도를 결정하는 책임은 연방 대법원에 주어지는데 9명의 대법관 가운데 주요 보수적인 대법관인 클렌스 토마스도 역시 스트라우스 추종자로 간주된다.
신보수주의의 첫 번째 단계는 로날드 레이건 밑에서 결실을 맺었다. 두 번째 단계는 지금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정확히 아는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 인 조오지 W 부시 밑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즉 종교는 국가의 애국적 결속력과 그의 재선을 위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인데, 재선을 위해서 그에게는 잘 짜여진 기독교 집단들의 표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교정책은 현대 보수주의 혁명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음모 이론가들에게는 부시 행정부는 아주 분명하게 스트라우스의 창조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세계의 유일 초강국에 의한 힘의 완벽한 활용을 주장하고, 전쟁을 공산주의 종언 이래로 정치적 도구로 주창했던 폴 월포위츠와 리차드 펄(Richard Perle) 보좌관에게 우선적으로 부여되어야만 하는 영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신보수주의자들은 스트라우스가 아닌 다른 교수의 학생들이다. 그 역시 독일 이름을 가지고 시카고에서 교수직에 있었던 학자로서, 스트라우스가 은퇴하기 직전에 거기에 도착했지만, 뉴욕에서 태어난 알버트 울스테터(Albert Wohlstetter)는 안전정책론을 가르쳤다. 그리고 월포위치(월포위치는 단지 스트라우스의 학과목 과정 중 단지 두개만 참석했다)와 펄에게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외교 정책에서의 수동성 대신에 공격성을, 사유의 방식으로는 낡은 것 대신에 변화에 대한 의지를 목표로 하는데, 이것들은 울스테터에게 돌려지는 생각들이다. 바로 이것들이 새로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조건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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