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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의 빈소를 찾은 문상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8일 오후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의 빈소를 찾은 문상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사대체 : 8일 오후3시45분>

<조선> 성장 견인차... 족벌언론 그림자 드리운 '밤의 대통령'


8일 별세한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
8일 별세한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
"그의 삶의 가치는 조선일보를 유지하고 조선일보를 좋은 신문으로 만드는데 그 전부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걸어야 했던 행로와 겪어야 했던 역정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지금은 미국 워싱턴D.C에서 '은둔'하며 간혹 칼럼을 쓰는 김대중 <조선> 이사기자는 방씨가 회사고문에서 물러난 99년 3월19일자 신문에서 방일영씨를 이와 같이 평했다. 방씨는 8일 타계했지만, <조선> 사내외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조선> 입장에서 볼 때, 방씨는 93년 3월 고문으로 물러날 때까지 근 56년간 동생 방우영 명예회장과 힘을 모아 <조선>을 쾌속성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신화적인 인물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30살에 사장으로 취임, 당시로선 <동아일보>에 비해 한 수 아래던 마이너신문을 국내 최대규모의 메이저신문으로 끌어올린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으로 돌릴 만하다. <조선>이 그동안 거둔 '양적 성장'은 그의 경영수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조선>은 9일자 부고 기사에서 '우리나라 언론창달에 이바지' '언론자유 신장에도 노력' '한국최고의 논객 영입' 등의 표현으로 그를 극구 찬양했다.

그러나 언론계에는 "방씨가 생전 권력 실세들과 유착해 <조선>을 족벌신문으로 키워 진정한 언론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등의 비판적 시각들이 적지 않다.

<조선>은 방씨에 대해 "1963년 3월에는 12일 동안 사설을 게재하지 않는 것으로 군정연장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1964년 8월에는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지만, 박정희 집권 초창기에 보였던 언론인으로서의 지조를 계속 지켜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박 정권이 안정화되자 그는 박 대통령과의 술자리를 즐기는 쪽으로 처세했다. 박정희 집권기에 대통령과 독대를 누렸던 언론인은 방씨와 김상만 <동아> 회장 정도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는 이 시절 방씨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방일영은 박정희의 가까운 술동무였다. 군사반란으로 갑자기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요정에 가보면 방일영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박정희가 보기에 자기에 대한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깎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 하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마다했을까?

나이는 박정희가 다섯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보나 방일영은 '촌놈' 박정희보다 한참 위였다.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중략)...조선일보사가 펴낸 방일영의 전기에 '권번(券番) 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일영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정희가 방일영을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2001년 7월 4일 <한겨레21>)


그렇다면, 박정희와 방일영의 유착은 어떤 결과를 낳았나? 70년대는 <동아>, <조선> 기자들의 대량해직(75년), 민주인권일지 사건(78년) 등으로 유신독재의 언론탄압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영장 없이 중앙정보부와 치안본부에 끌려가는 등 일체의 표현자유가 말살됐다.

그런데 세계 58개국의 언론자유실태(77년도)를 파악한 국제언론인협회(IPI) 보고서는 한국을 미국, 스위스와 함께 언론자유가 잘 보장된 국가로 분류했다. 이는 유신체제의 언론자유를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었다. 77년 당시 IPI 한국위원장은 다름아닌 방일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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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김대중, 김영삼 등 전 대통령이 보낸 조회가 나란히 놓여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김대중, 김영삼 등 전 대통령이 보낸 조회가 나란히 놓여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2001년 9월 이미경 의원(민주당)이 IPI의 실체를 폭로한 보고서에 인용된 방씨의 회갑기념문집에는 그가 우리언론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가 나와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IPI 위원들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당시 IPI 의장이 박 대통령에게 'IPI라는 것은 International Press Institute라기보다 오히려 International Playboy Institute의 약자인 것 같습니다'라며 농담했다. … 신문인들이 국제적으로 플레이보이로 소문나 있던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마닐라에서 회의가 있었다. 마닐라에서 신문발행인으로 이름난 5대 재벌 가운데 한 사람이 회의를 마치자 파티에 초청을 했다. 그곳으로 가보니 바다 위에 요트를 띄워놓고 밴드까지 불러서 호화잔치를 벌여놓았다. 그들이 논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놀이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여자까지 불러다놓고 공개적으로 놀았다.

이환의 전 MBC 사장(1975∼80년 재직)도 같은 문집에서 "방일영 회장은 '국내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국제적으로 나라와 언론계가 고립되고 망신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IPI의 이사진과 각국 대표단에게 한국 정부와 언론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밤을 새워 로비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방씨는 박 대통령과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는 '나라망신 시키지 않겠다'고 IPI 간부들을 상대로 기생파티를 여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IPI 한국위원회(위원장 방상훈 <조선> 사장)가 지금에 와서는 IPI가 한국을 '언론탄압 감시대상국'으로 지정하도록 부추긴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대목이다.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

권력을 등에 업고 사세를 크게 확장한 <조선>은 그 자체가 권력이 돼버렸다. 92년 10월31일 방씨의 고희기념 잔치에서 사원대표였던 신동호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이 행한 연설은 이제 '언론계의 전설'로 남았다.

"방 회장님을 남산으로 부르고 싶다. 남산에 있는 옛날의 중앙정보부와 현재의 안기부 못지 않게 회장님이 계신 태평로1가에 모든 정보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셨다. 회장님은 정보와 인재를 적절히 용재·용인하며 〈조선일보〉를 1등 신문, 최고의 기업으로 키웠다."(92년 11월 7일 <조선> 사보)

발언 배경을 놓고 해석 차는 있지만,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던 족벌언론 사주의 위세를 놓고 '밤의 대통령'만큼 적절한 표현을 찾기는 쉽지 않다.

YS(김영삼)가 김대중과 정주영을 열심히 헐뜯은 <조선> 보도에 힘입어 당선된 것도 92년이었다. YS가 선거 다음날 부부동반 만찬으로 승리를 자축한 곳은 다름 아닌 방일영의 흑석동 자택이었다. / 손병관 기자
방씨는 80년대를 거치면서 별다른 대외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 <조선>에서는 5공 정권과 유착해 '민주회복'에 재를 뿌리는 보도가 이어졌다. 권력의 귀여움속에 <조선>은 급속히 성장했다.

<한겨레> 92년 12월9일자에 따르면, 80년만 해도 <동아> (265억4천만원), <한국> (217억1천만원), <중앙> (214억7천만원)에 이어 4대 중앙일간지중 최저매출액(161억3천만원)을 기록했던 <조선>은 이후 11년간 1008.1%의 눈부신 매출증가율을 보였다. 바야흐로 91년에는 매출액, 성장률, 순이익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해 국내최대의 신문재벌로 우뚝 섰다.

<한겨레>, <국민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 > 등이 언론자유 바람을 타고 새롭게 창간했지만, 80년대 독과점 체제에서 든든하게 자본을 축적한 <조선>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이어 YS와도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YS 취임 직후 방일영은 YS의 의중을 오판한 적도 있다. <월간중앙>(2002년 10월호)에 따르면, 방일영은 하나회 출신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93년 3월7일 기분좋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청와대에서 만찬이 있었는데 새 대통령이 나한테 김 총장 얘기를 많이 묻더라고. 그래서 내가 김 총장에 대해 아주 좋은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대통령도 알겠다고 했고 말이죠. 내가 가만히 보니 올해 김 총장한테 아주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것 같아."

'밤의 대통령' 말만 믿고 다음날 오전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장병들에게 '신한국 건설 동참'을 호소하던 김 총장은 잠시 후 국방장관으로부터 '해임통보' 전화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방일영 역시 이틀 뒤 동생(방우영)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고문으로 물러앉았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방씨는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국악상을 제정하는 등 문화 활동에 관심을 쏟았다.

99년 당뇨병이 도져 고문을 사임한 후에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언론문화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방 전 고문은 일생을 두고 언론계에 공헌했고 방일영장학회와 방일영국악상 제정 등을 통해 문화 분야에서도 많은 일을 했다"며 "원만한 성품과 훌륭한 인격으로 방 전 고문만큼 사회에 많은 친구를 두고 있는 분도 드물다"고 극찬하기도.

그러나 방씨의 여생은 결코 평안하지 못했다. 방씨는 신문사 세무조사가 한창이던 2001년 7월23일 자택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뇌혈관이 터진 것이다.

입원 후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로 사경을 헤맸던 방씨는 다음달 20일 뇌수술까지 받았다. 장남 방상훈 사장이 조세포탈과 횡령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게 이 즈음의 일이었다.

2001년 목숨을 건졌던 방씨는 2년만에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전에는 언론사 사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그가 죽어서는 자식들에게 적잖은 유산을 남겼다. 지난 2월 대주주 지분 정보 제공업체 에퀴터블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방일영 일가의 추정재산은 1835억원으로 언론계 인사중 단연 수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98년부터 방응모의 친자 방재선이 방일영-방우영 형제(두 사람은 계초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한 방재윤의 자식들이다 - 필자주)를 상대로 '재산권 소송'을 제기해 집안의 불화를 표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방재선씨는 8일 <오마이뉴스> 기자와의 통화에서 생전의 방일영에 대해 "권문세가에 양자로 들어온 부친 덕에 일제시대에 징용도 안 끌려가고 고생 없이 성장했다. 호방한 성격에 술과 여자를 좋아했는데, <조선>을 성장시킨 공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평했다. 방씨는 "비록 적대적 관계가 됐지만, 망자(亡者)에 대한 예는 지키겠다"며 이날 저녁 문상을 갈 뜻을 내비쳤다. (<조선>은 방재선의 문상을 거절했다.)

김대중 이사는 방일영에 대해 "신문사를 조종하려는 권력의 속성이 그 어느 때보다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 방 고문은 자신의 고고함을 던져 신문을 살리는 길을 스스로 택했기에 그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어떤 지적 앞에도 초연할 수 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신문을 살리기 위해 택한 방법에 대한 옳고그름 논쟁은 <조선>이 존속하는 한 세인들의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릴 것 같다. 망자(亡者)에게 비교적 관대한 우리 문화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방일영이 그린 삶의 궤적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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