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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지독한 열대야에 몸살을 앓는 사람들이 산과 바다로 빠져나간 도심 한 복판. 얼음 창고에서 뿜어나오는 한기를 들이마시며 땀 대신 시린 얼음 조각으로 샤워를 하는 사람이 있다.

싸늘한 얼음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는 얼음 조각가 하석구(29). 볼품없이 투박하게 생긴 육중한 얼음 덩어리가 그의 손길을 거쳐 생명을 가진 만물로 태어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단 칼에 베어 버릴 듯한 전기톱이 지나가자 네모 반듯한 육면체의 얼음이 다양한 형상으로 돌변한다. 전기톱에 의해 사방 팔방으로 날린 얼음 가루가 작업실을 가득 메우자 그의 손은 얼음이 녹아 내린 물에 흥건히 젖어든다.

항상 물 마를 날이 없어 남보다 손톱이 빨리 자라는 것 같다는 하씨는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던 IMF시절 우연히 얼음 조각과 인연을 맺어 4년째 경력을 쌓고 있다.

ⓒ 김진석
우리나라에서 얼음 조각은 신라 지증왕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수라상 음식에 띄우는 얼음을 조각하면서부터 그 역사가 출발해 어느 덧 천년의 긴 터널을 통과했으나 얼음 조각가의 수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하나의 독립된 신종 직업으로 정착되어 고수입을 올리는 일본에 비하면 우리는 이제 막 발아하고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연례행사나 축하연에 등장하는 얼음 조각이 이젠 단순한 장식을 벗어나 신선한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비록 일회성에 그치며 사라져 버리는 얼음 조각이지만 보는 이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오랜 감동과 여운을 남겨준다.

얼음 조각의 여름 수명은 한두 시간에 불과하다. 반면 겨울 수명은 햇빛을 피한다면 24시간까지도 연장할 수 있다. 정성 들여 만든 자신의 작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법도 한데 오히려 하씨는 그 점이 얼음 조각의 매력이자 재미라고 한다.

특별한 연례 행사가 없는 여름엔 하루에 5작품 정도를 만들지만 성수기엔 하루에 10작품도 더 만들어야 한다. 결혼 시즌인 4월에서 6월, 10월과 11월엔 주로 잉꼬가 많이 나가고 송년회를 하는 12월엔 독수리가 많이 나간다.

ⓒ 김진석
하씨는 주문량이 적고, 여름에 비해 얼음이 녹지 않는 2월을 공들여 조각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로 뽑는다. 심하게 주문이 밀릴 때면 남들 쉬는 주말에 80작품까지도 소화해야 하는 그는 어쩔 수 없이 급히 조각을 만들어야 할 때가 가장 아쉽다고 한다.

그는 일반 조각과 얼음 조각의 차이로 '정교함' 을 꼽는다. 이유인 즉 눈썹이나 손톱 등 작은 것들을 꼼꼼히 표현하고 싶어도 금새 얼음이 녹아버리는 통에 기본적인 형상 표현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한다.

20분쯤 지났을까. 멋없는 얼음 덩어리가 축복의 나팔을 부는 어린 천사로 변신했다. 날개가 돋아나고 뽀얀 살결을 지닌 아기 천사의 유연한 형체가 드러난다. 투박하고 강인해 보이는 손이건만 그의 손길이 닿자 얼음의 결이 섬세히 살아나며 영롱함을 더한다.

ⓒ 김진석
하씨에게도 초보 시절이 있었다. 얼음 조각 청소부터 시작해 조각을 받치는 '로그'를 만들고 기본 형상(학, 봉황, 잉꼬, 독수리)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독수리 한 마리를 만드는데 채 15분이 걸리지 않지만 처음엔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잉태할 정도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얼음 조각가가 되기 위한 특수 교육 과정이 없다. 하고 싶은 마음과 열정만 있으면 언제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이에 하씨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끈끈한 인내와 135Kg에 육박한 얼음을 나를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실전 작업에 돌입 시 '안전'이 가장 중요함을 당부한다. 특히 초보자들은 사용하는 칼이 워낙 날카롭기에 아무리 두꺼운 장갑을 껴도 깊게 베인다며 '안전 제일'을 강조했다.

ⓒ 김진석
이젠 몇 명의 후배를 거느린 어엿한 주임이건만 하씨는 정교함이 요구되는 사람이나 동물을 만드는 게 아직까지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조각을 보고 남들이 기뻐할 때 일의 만족을 느낀다는 하씨는 언젠가 한라산 꼭대기에 말의 형상을 한 얼음 조각을 세우는 게 꿈이다.

항상 축복 받는 자리 곳곳마다 자신의 몸을 소리 없이 녹이며 그 자리를 더욱 빛내는 얼음 조각이 꼭 하씨의 마음과 닮았다.

ⓒ 김진석
하씨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독수리가 15분만에 탄생했다. 금방이라도 시원하게 비상할 듯한 독수리 조각을 보니 더위가 씻은 듯이 잊혀진다.

차가운 얼음이 일상에 스며들수록 우리의 마음은 점점 따스해져간다. 얼음과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영혼을 불어넣는 하씨는 자신의 열정으로 불볕 더위마저 녹이며 그 누구보다도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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