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 장에 담은 마음
2003년 2월 9일 토 맑음
05: 00, 일어나자마자 곧장 욕탕으로 갔다. 분명 간밤에는 여탕이었는데 오늘은 남탕 깃발이 달렸다. 대부분 남성들이 여탕에 들어가고 싶은 소원이, 반대로 남탕을 엿보고자 한 여성들의 호기심이 일본에서는 저절로 풀어지게 돼 있었다.
마침 욕탕에서 만난 김광회 씨에게 잠이 덜 깬 상태로 간밤 생각만 하고 입장했다가는 여탕으로 들어가서 망신을 당할 수 있겠다고 했더니, 이 나라에서는 혼탕도 있다는데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심각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무튼 재미있는 목욕문화였다. 각 나라의 문화를 살펴보면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 나름대로 거기에 알맞은 까닭이 있고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래서 남의 문화를 함부로 폄하거나, 자기 잣대로 매도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객실로 돌아오는데 지배인이 우리말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래서 재일교포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하얼빈 출신의 조선족 이철(李哲)씨라고 했다. 나도 하얼빈을 두 차례나 가 봤고, 서명훈 김우종 선생의 안내를 받은 바 있다고 했더니, 그분들은 조선족의 역사학자로 지도급이라고 깜짝 놀랐다.
06: 00, 객실에서 손님을 위해 마련한 것들을 살펴봤다. 일본의 여관이나 호텔은 으레 차가 준비됐고, 그 곁에는 일본 전통의 과자나 찹쌀떡 같은 게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은 가지절임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차를 마시며 맛을 봤더니 쌉쌀한 게 별미였다(나중에 확인한 결과 그 이름이 '나스'라고 했다).
우리나라 여관이나 호텔에도 우리의 전통 유과나 약과, 엿 같은 걸 마련한다면, 이런 고유 한과업소도 살리고 한국의 전통 간식도 자랑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좋은 방안일 것이다.
여행자는 조그마한 것에도 감동하기 마련이다. 또 다른 탁자 위에는 한 마리의 종이학과 한지에 붓으로 쓴 듯한 글씨의 인쇄물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털실을 가지고 놀고 있는 그림도 곁들여 있었다.
일본 글자는 모르지만 한자만 띄엄띄엄 읽어보니 인사장 같았다. 취재 노트에 넣어 버스 안에서 김자경 씨에게 보여줬더니 호텔주인이 자기네 객실에 묵는 손님에게 올린 인사장이라면서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해 주었다.
삼한사온 동안 햇살도 따사로워져서 고양이도 사랑을 나누는 계절이 찾아온 듯합니다. 돌아오는 새 봄에는 새끼들을 데리고 부자간의 산책을 나서는 걸까요. 기다리고도 기다리던 봄을 꿈꾸며 느긋하고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03년 2월
호텔 모리노가제 오오슈쿠
오카미(여주인장) 다테가와 후미코
한국전쟁 후, 수많은 주한 미군들이 휴가 때면 한국에 머물지 않고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서 휴가를 보내는 이유를, 한국의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연말연시면 일본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는 까닭을 알만 했다.
08: 10, 호텔 종업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모리노가제 오오슈크(森の風鶯宿)를 벗어났다. 어제와는 달리 날씨가 좋았다. 고속도로를 달리자 멋진 설산이 보였다. 이와테에서는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이는 이와테 산이라고 했다. 높이가 2038미터라는데 멧부리는 온통 눈에 덮였다.
10: 00, 아시로마찌(安代町)에 있는 앗피 그랜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은 천연설의 앗피고겐 스키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