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민간인 학살지인 단양 곡계굴과 문경 석달마을을 잇는 90km의 '2003 평화걷기'가 무더운 여름 날씨속에서도 한창이다.
민간인 학살지인 단양 곡계굴과 문경 석달마을을 잇는 90km의 '2003 평화걷기'가 무더운 여름 날씨속에서도 한창이다. ⓒ 정홍철
곡계굴평화위원회와 작은누리, 간디중학교가 공동으로 추진한‘2003 평화걷기’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지인 단양 곡계굴(일명 괴개굴)을 출발, 문경 석달마을까지 5일 동안 계속된다.

평화걷기는 '평화, 생명, 역사'를 주제로 지난 11일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을 출발하여 오는 14일 문경 석달마을 위령비까지 4일간에 걸쳐 총 90km. 하루평균 22km를 걷고 15일 오전 10시 해산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한을 생각하고 역사의 현장을 몸으로 배우고 있다.

참가인원은 총 50명으로 유치원생, 초등학생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참가했으며 걷기 구간은 ▲11일 : 단양 곡계굴-단양 감리교회 교육관(24km) ▲12일 : 단양 감리교회 교육관 - 방곡 도예촌(27km) ▲13일 : 방곡 도예촌-문경 학생야영장(18km) ▲14일 : 문경 학생 야영장-문경 석달마을 위령비(20km)-김용사 입구까지 총 90km이며 오는 15일 오전 10시 김용사 입구에서 강평을 갖고 해산한다.

곡계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유익형 교사.
곡계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유익형 교사. ⓒ 정홍철
곡계굴평화위원회 유익형(43ㆍ단양고 교사)씨는 “우리 민족의 50년 한이 담겨 있는 곡계굴에서 석달 마을까지 이어 걷는 것을 통해 우리의 걸음이 '몸으로 배우는 역사', '생명을 존중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이 땅의 평화'를 비는 작은 기도가 되길 바란다”라고 행사의 취지를 밝혔다.

평화걷기의 중간 기착지에서는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증언과 이와 관련한 역사에 대한 교육도 함께 실시되고 있다. 지난 10일 밤 느티마을에서는 곡계굴 유족의 증언이 열렸으며 13일 양희장(제천간디 중학교) 교장은 ‘평화걷기의 사회ㆍ역사적 의미’와 ‘민족과 역사,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어 14일에는 임광빈 사무처장(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이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강연을 한다.

걷기대회 참가자들은 무더운 날씨와 다리가 아프다는 점을 공통을 말했으며, 인터뷰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가 곡계굴 및 석달마을에 대한 개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좌로부터 강진우(대구 범물중 1년), 김민영(문경 대안학교 작은누리), 정진희(단양고 2년)군.
좌로부터 강진우(대구 범물중 1년), 김민영(문경 대안학교 작은누리), 정진희(단양고 2년)군. ⓒ 정홍철
이번 참가가 두 번째라는 강진우(대구 범물중 1년)군은 “다리 힘과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참가했다”며 “곡계굴과 석달마을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군은 가족, 친구들과 함께 참가했으며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나마 힘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이어 곡계굴에 대해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강군은 “6·25때 피난민들이 미군으로부터 가스 폭격을 당해 300여명이 질식사했다”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친구 7명과 함께 참가한 정진희(단양고 2년)군은'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컴퓨터 게임이다”라고 말해 샤워나 충분한 휴식이 필요 할 것이라는 기자의 예상이 빗나가기도 했다.

참가자들에게 뜨거운 날씨와 다리의 피로는 가장 힘든 여건이다.
참가자들에게 뜨거운 날씨와 다리의 피로는 가장 힘든 여건이다. ⓒ 정홍철
힘든 여건 속에서도 걷기는 계속되고 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걷기는 계속되고 있다. ⓒ 정홍철
중간 중간의 달콤한 휴식시간
중간 중간의 달콤한 휴식시간 ⓒ 정홍철
아버지(유익형 교사)를 따라 나선 예하(6세)양이 씩씩한 걸음을 보이고 있다.
아버지(유익형 교사)를 따라 나선 예하(6세)양이 씩씩한 걸음을 보이고 있다. ⓒ 정홍철


<증언>생존자 증언으로 듣는 곡계굴 민간인 학살
조봉원(2002 유족증언대회)

본인은 6·25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가족이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에 살고 있었다. 당시 1·4후퇴 과정에서 인민군과 연합군측의 교전과 상호 밀고 밀리는 전세에서 영춘에는 인근 강원도 등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다수 있었고, 피난민들과 마을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은신하기 위해 방공호로, 마을로, 괴개굴(곡계굴)로 왔다 갔다 해 마을에서 괴개굴에 이르는 길은 한 겨울인데도 큰 대로가 생길 정도였다.

1951년 1·4 후퇴 당시 1월 18일, 어머니, 작은 아버지, 형수, 사촌형과 함께 피난을 가고자 단양 방면으로 나가던 도중 단양군 가곡면에서 미군이 못가도록 저지함으로써 다시 고향인 영춘면 상2리에 돌아왔다.

1월 19일 오전 10시경 폭격이 있을 거라는 말에 가족들과 마을주민 및 피난민들은 마을내 자연동굴인 괴개굴로 피신했으며, 그날은 아무 일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다음날인 1월 20일 점심 무렵 갑자기 "꿍, 따따"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기관총소리와 소이탄(큰 휘발유통 같은)이 폭발해 동굴 바깥과 안쪽이 연기와 불에 휩싸였다. 4대의 비행기가 돌아가며 폭격을 계속했으며, 동굴 안에 있던 피난민들은 불과 연기로 인해 덮고 자던 이불과 옷가지, 콩단(바닥에 깔았던)에 붙은 불길과 굴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화염에 타죽거나 질식해 죽어갔다. 굴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비행기에서 쏘아대는 기관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중 조광원, 조봉식은 바깥으로 나가다 기관총탄에 배와 다리를 맞아 죽었다.

본인은 연기에 질식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젖은 광목수건을 입에 두르고 있다 기절했으나, 폭격이 끝난 후 마을 청년들이 본인을 굴 바깥으로 끌고 나와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깨어나 보니 마을 청년들이 광목수건을 얼굴에 두른 채 동굴 안의 시신을 끌어내고 있었으며, 처참하게 죽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계속 굴 안에서 나왔으며,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

그때의 폭격으로 본인은 부친 조부동과 여동생 조순자, 조카, 가족과 함께 살고 있던 김용집을 잃었으며, 여동생 조순자는 당시 화염에 팔과 다리 등 4지가 거의 다 타버려 몸통만 남다시피 한 처참한 상태에서 발견되어 들려나왔고, 초등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밤새 미친 듯이 중얼거리다 죽었다. 결국 자식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형상과 가족의 죽음에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도 그해 가을 돌아가셨다.

당시 같은 마을의 김봉훈, 조재희, 조형원(8명의 가족이 희생), 김석운, 조학기, 안광국 등은 가족이 모두 폭격으로 학살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굴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시신의 일부가 떠내려 오기도 했고, 동네 개들이 물고 다니던 어머니 시신의 일부(머리부분)를 발견한 유족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된 피학살자들도 많았다. 이렇게 그날의 폭격으로 영춘면 주민 100여 명, 인근지역 피난민 300여 명 등 총 4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최근까지 확인된 사망자의 명단이 2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 조봉원

<증언>경북 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학살 전모
채의진 (문경 양민학살 피학살자 유족회장)

서기 1949년 12월 24일(음력 11월 15일) 정오경 24가구에 127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에 무장군인 70여 명이 느닷없이 마을에 들이 닥쳐 자신들에게 대접이 소홀하다는 것을 트집 잡아 주택 24가구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 전체를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 산모퉁이 두 곳에 모아 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다.

마을 뒤 산모퉁이에서 학살당한 주민들은 산 넘어 석봉리 동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던 청장년들과 학교에서 하교하던 어린 초등학생들이었다. 마을 앞 논바닥에서는 1차 학살을 끝내고 산 사람들은 살려준다며 일어서라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일어선 사람들에게 재사격을 가하여 확인 사살까지 자행했다.

불과 한 두 시간 동안에 마을의 집들은 모두 불탔고, 마을 주민 8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일부 생존자 중 중상자가 10여 명이었으나, 그들 중에 2명은 이날 날이 어둡기 이전에 그리고 2명은 자정 이전에 사망했고, 1명은 입원 가료 중 사망하여 이 날 국군들의 만행으로 학살된 마을 주민은 모두 86명이였다.

피학살자들 중에는 5세 미만의 어린이 11명을 포함해서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32명이었고,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42명이였었다. 피학살자들 중에는 초등학생도 6명이나 포함되었고, 타 동민도 1명 있었다. 전 가족이 몰살된 집이 6세대였으며, 여자 1명만 생존했거나 남자 1명이 생존했어도 고령이여서 대가 끊긴 집이 6세대였다.

학살 군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 집들을 모두 불태워 마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빨갱이는커녕 티끌만한 죄도 없는 마을 주민들 전부를 빨갱이로 몰아서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후 오후 2시경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아비규환의 참살 현장에서 시신 밑에 깔려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처절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뒤엉켜서 숨져 있는 시신들을 뒤져서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내고 부상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해가 지자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생존자들은 졸지에 당한 너무도 기막힌 현실에 슬픔과 분노도 잊은 채 추위와 공포에 쫓겨 가족들의 시신을 참살 현장에 그냥 남겨둔 채 일단 피신했다. 일부는 가까운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친인척 집을 찾아갔고, 일부는 해방 전 중석을 채굴하다가 폐광이 된 마을 아래쪽에 위치한 중석굴에서 밤을 세웠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많은 시신들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 버렸다. / 채의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