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도 향기가 있다.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려 보면 독특한 내음이 느껴진다. 이는 ‘바위옷’이나 ‘이끼’에서 배어나오는 텁텁한 식물성의 냄새이거나, 지상에서 떨어져 나온 살 한 점임을 증명하는 듯 고소한 광물성의 체취로, 그것은 돌 속에 영속하는 시간의 냄새이기도 하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이 ‘바위’라는 불멸의 대상 앞에 한없이 나약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바람이 불며, 모든 태어난 것들이 시간을 다투어 스러져 갈 때 목숨이 태어나기 전부터 한곳에 있었던 커다란 돌은 내가 죽을 때도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목숨과 권력 또한 돌로 만든 무기와 도구에 의해 좌우되었으니 신성(神性)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신성에 기대어 사후(死後)의 권력까지 기약하며 돌 밑에 묻혔다.
그러나 그것이 ‘고인돌’이라는 고대인들의 무덤인줄 몰랐던 근세의 사람들은 그냥 영험한 돌 정도로 여겨 그 위에 정화수를 놓고 가족들의 안녕을 비는 장소로 이용한다든가 동네 아이들의 놀이장소로 두는 등 친근한 생활풍경 중의 하나로 여겼을 뿐이었다. 이처럼 주변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듯 한반도는 무려 4만여기가 조사된 가히 ‘고인돌 왕국’으로 이름이 높다. 이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도 비길 데를 찾아보기 힘든 거석문화 유적인데 그것도 전북 고창, 화순 등의 서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 인근 야산은 500여기의 고인돌이 밀집된 최대의 공동묘지이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전북 고창은 이곳으로 이주했던 고대인들에게 농경을 통한 최초 정착생활의 적지였을 것이다. 정착농경은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인구의 증가를 불러 오고 지배자의 권력도 확대 시켰다. 또한 대규모의 노동력 동원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고인돌 축조는 단순한 무덤의 의미만이 아닌 농경지 확보를 위한 집단간 경쟁에 있어 영역표시의 기능까지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죽음은 이승과 저승을 나눈다. 산자들은 제의(祭儀)를 통해 죽은 자를 위로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죽은 이를 통해 살아있는 자들은 결속을 강화하고 권력을 계승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협력인 셈이다. 이런 제의를 위한 고인돌의 운반과 축조엔 적게는 50명에서 많게는 2~3백 명까지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1000~1500 이상의 인구를 가진 집단이어야 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며 무덤의 주인은 당연히 집단의 지배자였다. 곧 고인돌의 운반과 축조행사는 당시의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서는 대규모 행사였으며 혈연으로 맺어진 자체구성원 외에도 이웃 혈연, 부족들까지 동원 가능한 사회적 협력체계와 지배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고인돌의 형식은 북방식으로 불리는 탁자식(卓子式)과 남방식으로 분류되는 기반식(基盤式), 개석식(蓋石式)의 세가지로 분류된다. 탁자식은 판석 4매로 짜맞춘 무덤방(시신을 안치하는 곳)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형태로 주로 한강 이북에서만 발견되어 북방식으로 불리는데, 큰 것은 무덤이 아닌 주로 제단이나 기념물로 축조되었다. 기반식은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형식인데 무덤방과 덮개돌 사이에 받침돌로 인한 공간이 생겨 바둑판처럼 보이는 탓에 기반식으로 불린다. 탁자식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큰 것은 제단이나 기념물로 쓰였다. 개석식은 무덤방이 지하에 있고 바로 덮개돌을 덮은 형식이다. 이 형식에서 제단이나 기념물로 쓰인 사례는 없으며 모두 무덤이다.
매산마을의 고인돌군은 고인돌이 일정한 형식으로 놓여 있지 않고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서, 하나에 1백톤이 넘는 것도 있지만 마치 큰 고구마들이 널브러져 있거나 사방에 먹음직한 인절미를 널어 놓은 모습처럼 친근하다. 화순의 고인돌 공원은 잘 정돈된 교육장으로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들르면 학습효과가 만점인 곳이다. 야외전시장엔 고대인들의 주거와 함께 고인돌을 실제 끌어 볼 수 있는 체험장까지 재현해 놓았으며 전시관 2곳은 선사시대인들의 생활상과 각종 유물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