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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1일)은 저의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난 지 100일이 되는 날입니다.

아기가 태어나 100일을 맞으면 잔치를 열어 축하해 주고, 높은 사람들이 취임 100일을 맞거나 큰 사회적 사건이 난 지 100일이 되면 대개 언론에서 특집 기사 제작, 기자회견 등을 하여 그 성과를 점검하기도 하고 의미를 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평범한' 사람이 100일을 맞이하면 대개는 아무도 모르게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살아 있는 사람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이라 하더라도, 짧은 시간 사람들의 관심권에 있다가 100일 정도 지나면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차츰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그리고 그 망각의 언저리에 당사자인 가족들의 절망만이 안타깝게 휘돌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5월 13일. 그 눈부시게 찬란했던 신록과,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던 아카시아 꽃의 향기가 온 세상을 적시던 그날 오후,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과 시설을 자랑하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의 한 실험실에서 어이없는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이 나라의 최고 수준의 학자들, 다른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따라오기 힘든 훌륭한 연구 환경, 거기서 산출되는 세계 수준의 연구 성과들…, 이처럼 이곳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희망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연구기관에서 정규 근무(교육과 연구) 시간에 열악한 시설의 영세 사업장에서나 일어남직한 원시적인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고로 한 가정의 꿈과 미래이자 든든한 기둥이었던 저의 아들이 유명을 달리했고, 또 한 명의 동료는 두 다리를 모두 잃는 비참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고 후 원장(지금은 총장)님을 비롯한 학교 보직자님들, 그리고 학과 교수님들을 위시한 실험실의 동료 대학원생들은 최대한의 성의와 배려로 망자를 위해 학교장으로 저의 아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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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이틀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하게 실험실에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가 그 이유도 원인도 영문도 모른 채 느닷없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을 놔두고 타의에 의해 먼 길을 떠나야만 했던 한 청년.

저는 화장장에서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버린 그 아들의 유분을 선산 기슭에 뿌리면서, 사흘 내내 마르지도 않고 흘러내리던 마지막 눈물을 그 바닥까지 긁어내서 쏟아내야 했습니다.

저의 그런 심정을 알 리 없이 선친의 묘소 주변에 피어 있던 찔레꽃의 향내는 시나브로 날아와 가슴 속의 정념을 모조리 뽑아 버린 제 텅 빈 마음에 조금씩 고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벽지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5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아드님이 없으신 큰아버님께 입양이 되어 손이 귀한 종가의 5대 종손이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스물 여덟 살에 중매로 결혼을 하였고(양아버님은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장가를 보낸다고 서두셨던 분인데 제가 불효를 많이 한 셈이지요), 셋방살이를 하면서 1남2녀를 낳았습니다.

70년대 말에는 정부에서 가족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할 때라 아이 셋을 낳는 것은 마치 '야만인'처럼 취급받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셋의 자녀를 두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홀로 자란 저의 외로움과 종가의 종손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를 낳을 때 욕심으로는 딸보다 아들을 원했었지만, 그게 사람의 마음대로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제 아들은 저를 닮아 몸이 매우 약했습니다. 징병검사에서도 43킬로그램의 체중으로 간신히 3급을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그 대신 두뇌만은 누구 못지 않게 명석해서 고등학교 내내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고, 대학(고려대)에서도 4년 동안 외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모교에서 마치고, 자신이 어려서부터 꿈꾸어 오던 항공우주 분야 공부를 위해 작년에 카이스트 박사과정에 입학을 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방학과 휴일도 없이 실험실과 기숙사를 오가면서 연구와 학업에만 몰두했습니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 술과 담배는 물론 바둑이나 장기 등 오락과도 담을 쌓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아이였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의 옷이나 물건을 하나도 사본 적이 없이 사소한 물건(양말이나 작은 소지품까지도)도 모두 제 엄마가 사다주는 것만 입고 쓰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아들은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남의 말 듣기를 좋아했고, 알고 있는 것을 내세우거나 자랑하기보다는 모르는 척하며 감추기를 잘하던 아이였습니다.

목소리가 작아 대인관계가 걱정스러웠지만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과는 잘 어울렸다고 하며, 국제학술회의에 가서 논문을 발표할 때는 매우 자신감 있게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옛 일이 되어 버렸고, 저의 아들은 먼 전설 속의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의 아들은 이제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만, 뒤에 남은 저와 저의 가족들은 감당키 어려운 상실감과 절망 속에 일상생활이 거의 파탄이 나 버렸습니다.

'유능한 인재는 하나님이 일꾼으로 쓰시려고 먼저 데려가신다'거나, '전생에 좋은 업을 많이 지어 깨달음에 근접해 있는 사람은 고통의 바다인 이승에서 일찍 떠난다'는 식의 종교적 수사는 저에게 별다른 위안이 되지 못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 두 개, 세 개를 주고서라도 원래대로 다시 돌려놓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게 아무리 헛된 망상과 집착이라 해도 그 끈이 쉽게 놓아지지를 않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졸지에 '유족'의 입장이 되어버린 저나 저희 가족, 지도교수를 비롯한 학교측 관계자들은 모두 똑같은 피해자들입니다. 저는 제 아이 문제로 학교와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한때 수사 당국의 일 처리 방식과 학교의 무성의에 대해 분노하고 서운한 감정을 표명한 적이 있지만, 저의 고귀하고 소중했던 아들을 매개로 흥정하고 협상하는 흉한 모습은 없었으면 하는 게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비록 지금 저 개인과 제 가문에 비운의 장막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해도, 저는 제 아들이 하지 못하고 간 일을 동료나 후배들이 중단 없이 수행을 해주고, 미처 피우지 못한 꿈과 희망이 서려 있는 캠퍼스에 제 아들을 기억해주고 추모해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간혹 마음 내키면 바람으로 오거나 가랑비로 오는 제 아들이 그곳에서 후배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힘든 일을 격려해주며, 이 교정에 영원히 살아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100일이란 시간은 사람에 따라 아주 긴 시간이기도 하고, 찰나에 지나가버리는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람 사는 따뜻한 세상에서 갑자기 축축한 지옥의 세상으로 바뀐 지난 100일의 시간이, 화들짝 놀라 깨버리면 그만인 무서운 악몽이거나 한 순간의 헛된 상상이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불가능한 상상에 매달려 마치 무뇌아처럼 살아온 지나간 100일의 세월, 그 동안 제가 겪은 그 절망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그걸 가늠할 저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 절망과 슬픔의 무게는 고스란히 제 아들에 대한 지극한 저의 사랑의 무게와 똑같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무게를 아무리 재보고 싶어도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걸 측정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사람과 헤어져 보아야 합니다. 이별 후에 느껴지는 슬픔의 무게가 바로 그 사랑의 무게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 아들이 떠난 후 평소에도 표준에서 한참이나 미달인 저의 체중이 6kg 정도나 줄었는데, 그 무게는 절망의 무게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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