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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우 시인은 내가 지금까지 대해 본 어떤 시인들과도 다른 사람이었다. 데카당스한 정조가 휘돌고 어딘가 지적인 우울함이 풍기는 그런 전통적 시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을 긍정적으로 살아내는 억척같은 생활인의 면모가 두드러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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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찾아와야 쓰지"

- 이 시인의 시에는 생에 대한 근원적인 슬픔을 느끼는 대목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혹 소년기에 간직한 마음의 상처 같은 건 없나요?
"누구나 그런 정도의 상처는 있는 법이지요.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거나. 난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는 없어요. 희한하게 타인이 나에게 상처를 준 기억이 없어요. 여자 문제만 해도 그래. 딱 만난 게 안식구여. 전기 비슷한 충격을 느꼈어.

나는 어릴 때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어요. 지금도 이렇게 작지만 어릴 때 고만고만 한디 가령 힘으로 하자면 동네 내 또래에서 나를 이길 사람이 드물었어요. 그러고 내 자신이 선의를 가지고 살았으니까 같은 또래 중에서도 나한테 상처를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이가 두세살 많은 형들이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러면 난 끝까지 버텼어요. 저건 놔두면 안된다는 거지. 나이 먹은 사람이 나를 때리면, 더 때려라 이거지요. 사실 맞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에요. 내 마음에 공포심만 없으면. 난 역전이 어느 순간에 오는 걸 알았던 것이지요. 어릴 적부터. 드라마가 뭔지를 아는 사람이지요.

난 슬픔이란 걸 이렇게 봐요. 뭐냐면 중요한 이야기인데 가령 내가 한 슬픔을 느낀다고 합시다. 이 슬픔은 세상의 거대한 한 쪼가리야. 그러니까 나만이 특별하게 느끼는 슬픔이 아니라는 거지요. 자기 슬픔을 계량화하고 객관화 할 수 있어요. 말하자면 내 슬픔이 이게 몇 근짜리냐. 요 감정을 내가 5분간 지속시킬 수 있겠는가, 아님 10분간? 이런 게 스스로 판정이 서요. 자기에게 다가온 어떤 상황을 뚫고 나갈 때 그걸 이용하는 거지요. 아, 이것은 암만 어려워도 하루 자고 나면 해결될 거야. 그런 식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거예요."

- 슬픔이란 감정은 본래 주관적인 것인데 그걸 객관화 시킨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텐데요.
"어린 날부터 내가 생각을 깊이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 깨달은 것이 그거 였어요. 이런 슬픔 같은 것도 사실은 요 순간에 내가 사로잡혀 있을 뿐이고 퉁 하고 빠져 나가면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요."

이면우 시인이 근무하는 책상
이면우 시인이 근무하는 책상 ⓒ 안병기
-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자기절제가 강하신 분이군요.
"이런 게 있어요. 사실은 어떤 사람들은 지상에 지뢰가 도처에 깔려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난 지상에 있는 지뢰가 아니고 마음에 있는 지뢰를 경험했어요. 나는 내 마음에 있는 지뢰를 통과해 나오는 것이 힘들었던 거예요. 삶이… 말하자면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내 자신이었다는 것이지요. 남들은 바깥에서 어려움을 겪는가는 몰라도 난 그런 걸 겪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살면서도 남한테 당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건 정말 특별한 거 아닐까요? 본인 자신이 선량하기 때문에 당해본 적이 없다는 거.

그런데 내 스스로 제일 무서워하는 게 있다면 자신 속에 있는 격정. 뭐냐하면 그 격정을 詩를 통해서 내가 소년기에 형상화 시켰을 때 무섭다는 걸 안 거예요. 내 격정이야 말로 공포다. 이 격정을 잘 다스려내지 못하면 난 실패한다. 나 자신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이것이 내 최대의 명제였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살면서 늘상 조심하고 소심한 면이 거기서 드러난 거죠. 소심하고… 그러니까 타인과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 끌고 가려고 노력하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것이 다 자기 속에 있는 격정을 보는거지요. 그 격정이 어떻게 자기를 파괴시킬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외면이 안온하다고 해서 뼛속까지 안온하다고 볼 수는 없는거지요. 내 경우도 아주 격정적인 스타일인데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 하면 섹스에서 푸는거여. 안식구와의 섹스에서…"

-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들은 때때로 자신에 대한 연민에 가득 차서 자화상을 그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아직 자화상을 그린 시가 없더군요. 그건 자기 연민이 없는 탓인가요?
"나 자신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어디가 불쌍합니까?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직업 있고 건강하고 가족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모든 걸 다 가진거예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는 거예요. 내 슬픔이 절제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절약도 극한까지 밀고 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적당한 선에서,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나 자신을 유지하는 선에서 멈춰있어요. 그러니까 나 자신도 누리고 있는 거예요.

지상에서 그 영점의 극한점에서 사라져간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연민을 가집니까? 자기연민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타인에 대해서 연민을 가진다면 그건 중요한 역할을 하겟지요. 내가 뭔가 움직일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맘 먹은 이상 뭔가 움직이겠지요? 그러나 자기연민은 크게 중요하지 않지요."

- 그렇더라도 자기연민은 때때로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존재의 유한성을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난 10년만 살면 돼. 말하자면 육십까지만 살면 된다. 고향마을에 보면 60 넘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60까지만 살면 돼. 지금 53이니까 얼마만 더 살면돼. 이렇게 늘 유한성을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과 생각하는 게 틀린 건가요?"

- 그것은 단순히 남은 생애에 대한 계획에 불과한 것 아닐까요?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나는 왜 태어났는가? 라는 식의 그런 질문 같은 건 없어요."

그의 시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정서적 바탕이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음악은 좋아하세요? 좋아하신다면 주로 어떤 장르의 음악을 들으시는지요?
"클래식을 좋아해요. 모차르트나 바흐. 이상하게 왜 그런지는 몰라도 난 베토벤보다는 모차르트나 바흐가 좋아요. "

- 그건 아마 바흐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더 가까이 닿아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난 음악을 듣고 머물러 있는 식인데… 모차르트를 들으면 마음이 참 좋아져요. 그리고 때때로 일년의 하루는 김현식의 날을 정해 가지고 김현식의 테이프를 들어. 특별히 어느 곡이냐고 할 것 없이 다 좋아하지. 제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노래들을 외울 정도로 다 알아 따라서 부를 수 있을 만큼 되니까. 테이프 앞 뒤로 박힌 거 열 몇 곡 되는데 다 좋아해요. 김현식의 노래는. 분위기를 가진 사람 같아 독특한 분위기. 그 사람의 분위기를 즐기는 거에요. 분위기를…."

- 대전에서 문학하시는 분들과도 교류가 있으신지요?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소속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나가지 않지요. 처음에 출발할 때 함께 했으니까 이름만 걸려있는 거지요. 나는 결코 투사도 아니고 투사가 될 생각도 없어요. 말하자면 신경림 시인이 큰 시인인 것은 정의를 이야기하기 때문이고 이면우가 작은 시인인 것은 선의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선비는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닙니까? 선악을 가리는 게 아닙니까? 나는 선비가 아니라고 말했지요? 선비가 아니고 평민이란 거예요. 자기 계급을 한정시킨 거예요. 일찍부터. 나는 집에 가면은 '빤츠'만 입고 있단 말이에요. 내가 왜 의관을 정제하고 뭔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수양하기 위해서…. 그런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나는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에요.빤츠만 입고 있다가 목욕하고 싶으면 홀딱 벗고 목욕하고,

나는 이 방향으로 가겠어. 이것이 옳아. 저것은 문제가 있어. 그런 식이 아니라는 거지요. 구호나 슬로건은 그 자체가 정의죠. 그 깃발 자체가 정의라고 말할 수 있지요. 난 그 깃발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고, 그저 작은 삶에서 나날의 기쁨을 느끼면서 산다 그런 거지요."

- 선의로만 세상을 바라보려면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어야만 가능한 건데 인간의 실체는 사악한 편에 가깝거든요. 그렇게 되면 정의의 문제,죄와 벌의 문제가 떠오르게 되는데요.
"내가 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가 아까 정의에 대해 이야기 했었지요? 어떤 선택된 사람들은 정의를 가지고 세상을 움직일거란 말이죠. 나는 내 자신이 작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고. 욕망도 작고 현실적으로 하고있는 일도 작고 원하는 일도 작아요. 밥 세 끼 따뜻한 밥 먹고, 일하고 씻고 잠자고. 그 이상은 뭐 없어요. 그러므로 나같은 사람으로서 필요한 것은 선의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자신을 객관화 시킨거예요. 나 자신은 절대로 세상을 향해서 이것이 정의라고 외치면 실패다. 왜냐면 나는 그럴 그릇이 아니다. 나의 그릇은 그저 선의만 담고 가면 된다. 내 주변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관계하는 속에서 내 선의가 잘 유지되고 주변사람들에게서 내가 상처를 받지 않으면 된다. 실제 상처받은 적은 없어요.

그런데 선의에서 자기를 우뚝 세우는 것이 정의 아닐까? 말하자면 자기를 고집하는 거지. 그런데 나와 우리 안식구는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이에요. 선의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자. 선의를 가지고. 우리가 늘상 우스개 소리로 하는 소리가 있어요. 베드로 어머니의 파 한 뿌리."

- 아까 이름만 걸어놓으셨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대전에 있는 민족문학 작가 회의 소속 시인들과 엔솔로지도 만들고 그러셨다면서요?
"네. <평상>이라는 동인에서 활동했는데 <그 숲을 지나왔네>라는 제목으로 엔솔로지를 내기도 했어요. 내가 왜 두 번째 시집 냈잖요?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북 갤럽'이라는 출판사에서 낸 거. 그 출판사에 이면우하고 친한 황규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었어요. 인터넷을 통해서 <평상>이라는 동인도 알고 그 <평상>에 이면우가 속했다는 걸 안 모양이에요. 그 사람은 나이가 나하고 열 살 차이가 나는데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 선생님, 선생님의 동인지를 우리가 낼 게요. 그냥 내드릴 게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준다고 해서 그러면 손해 안보냐고 그랬더니 손해 안볼 거예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동인지 하고는 상관을 안하니까 활동을 안하니까 총무에게 소개를 해주고 그 다음날 전화를 걸었지요. 내 시집 <그 저녁은 다시 오지 않는다>를 내라. 그러니까 앤솔로지도 거기서 나왔고 내 두번 째 시집도 거기서 나왔어요."

- 황규관이라는 시인이 참 좋은 사람이네요. 따분한 질문이지만 <그 저녁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두 번 째 시집은 몇 권이나 나갔지요?
"그냥 1쇄 찍어가니고 팔고 있는가 보더라고. 2천권 찍었는데 이제 거의 다 팔렸다고 하더라고. 내가 그렇게 했어요. 동인들한테 조금씩 사라. 그래서 열명이서 각자 20, 30권은 샀을거예요. 그렇다면 300권은 팔았겠죠?"

- 창비에서 나온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라는 시집은요?
"한 오천권 판 모양이더라고요. 인세 250만원 받았어요. 받았는데 책을 사서 돌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게 나쁘다기 보다는 워낙 글쓰는 시인들이 돈을 못 버니까."

ⓒ 안병기
아내와 처음 맺어진 곳 산이다 돈 안 드는 꼬불꼬불 산길이나 가다가 그예 일 저질렀다 세월 한참 흘러 아내와 깊이 맺어진 곳 산이다 느타리버섯 막 세울 리기다송 열댓 그루 산림감시원 피해 한밤중 마을로 들여가는데 아내는 낭창낭창 우듬지 메 앞서고 밑동 내 어깨에 얹어 소쩍새 우는 종산 등고선 따라 뒷것 맨 앞에 두고 다시 뒷것 맨 앞에 두며 밤새도록 먼 마을로 들여가는데 달 밝은 봄밤 철쭉은 뭉텅뭉텅 붉고 송진은 온몸에 찐득찐득 으깨진 풀냄새 가득한 어디쯤 나란히 앉아 땀 훔칠 때 골짜기 저 아래 외로운 불빛 깜박깜박 나는 산아래 마을이 생겨난 아득한 옛날부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깊은 밤 여기서 마을을 내려다 보았을까 먹고사는 걱정에 가슴 졸였을까 그리고 지금 사내 계집이 함께 산에 죄 짓는 중이다! 그렇게 한꺼번에 뜨거워지며 달빛 가득한 골짜기 향해 짐승의 외마디를 내지르던 거였다.

이면우 시 <산> 전문


- <산>이라는 작품이 매우 관능적이더군요.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하루는 내가 소를 몰고 올라오는데… 그러니까 거리가 조만큼 밖에 안되는데… 동구나무 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보고나서 곧 바로 친구에게 소개해달라고 했지.

당시에 내가 여자를 보는 눈은, 꽃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함께 도와 가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건강하게. 그때 내가 27살이었는데 난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통했어요. 지금은 소탈하게 말을 잘하는데, 그 당시는 내가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노동을 시작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그때는 심각한 측면이 강했는데… 그런데 이런 게 있었어요. 모든 건 선의로 통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충돌이 발생할 때 선의가 가장 관건이 된다. 그러니까. 내 자신도 삶을 잘 유지하려면 선의를 갖자, 어떤 경우에도 항시 선의로서만 마음 자세를 가지면 실패할 이유가 없다 이런 식인 거지요.

그러니까 친구이자 안식구의 조카인 사람에게 나 저 여자가 맘에 든다 저 나를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날 밤에 만나게 됐지요. 안식구 회고에 의하면 그 전에 나를 한 번 봤대요. 시골이니까. 어느날 보니까 왠 국민학생 같은 사람이 앉아 있더래요. 그때 조그마했거든요. 지금은 살이 좀 붙었고. 그게 당신이더라 하더라고요. 집사람은 나하고 같아요. 아주 똑같진 않아도 거의 같아요.

중요한 이야기 합시다. 안식구와 며칠 데이트를 했는데 대전 톨게이트 위쪽 마을인데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고 들어오면 시골이니까 내가 바래다 주어야 하는거죠. 보문산 갔다 돌아오는 길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대전을 다녀갔는지 톨게이트에 국화꽃을 쭉 놔뒀더라고요. 그런데 안식구가 그걸 가지고 가겠다는 거예요. 내가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하냐고 물으니까 자기가 국화꽃을 좋아하는데 저렇게 이쁜 국화꽃을 못보았다는 거야. 그게 탐이 난다는 거야.

그런데 그 순간 내가 뭘 생각했냐하면 우리가 보통 죄 문제를 따지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걸 안 따졌다는 거예요. 아,이 여자는 나와 살면서 평생 관념적인 선과 악 때문에 나를 괴롭히진 않겠구나 .난 순간 그걸 본 거예요. 어떤 당위성 같은 걸로 나를 괴롭히진 않는다는 거지요.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건 뭐냐하면 화분 하나라도 집으로 끌어들이려는 마음. 죄의 문제를 떠나서, 뭔가 하나라도 더 끌어들이려는 마음. 생활력이지요.

내가 그 당시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에요. 그냥 지나가는 노동자가 아니고 좀 깊은걸 봤으니까. 적어도 이 여자가 마음속에 있는 선악의 기준 때문에 괴로워하고 살 사람은 아니구나. 그러니까 같이 살면 편하겠다. 우리 둘이 살면 잘 살겠다.뭐, 그 예상이 딱 맞아 떨어진 거지요. "

- 신혼생활은 맨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대전 홍도동에서 시작해서 몇 년 후에 두 칸 짜리로 옮겨 갔어요. 노가다를 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내가 자격증이란 게 있었어요. 자격증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격증 수당이 있었거든요. 내가 보일러공이니까 보일러를 설치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었어요. 그 자격증을 가지고 회사를 들어가면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한 노동은 하루하루 품삯으로 나오지만 자격증 수당은 따로 나와요.

빌려준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고 내가 그 면허를 가지고 일을 하는거지요. 일을 하는 날만 일당을 받고 수당은 한 달에 얼마씩 받는거죠. 회사에서 면허가 내 것이 걸려있어 가지고 그 회사가 움직여 가는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면 처량하게 산 거는 아니었어요. 그런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그 면허 수당이 다달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육 개월에 한번씩 나오니까 그것이 모아지는 거지요."

- 그건 면허증만 빌려줬지 보일러실에서 일하는 거는 아니잖아요?
"지금 가진 면허증은 보일러를 운전하는 면허증이지만 이건 그 뒤에 새로 딴거고. 애초에 현장에서 일할 때는 보일러를 설치하는 면허가 있었어요. 원동기시공면허증이라고 하는거요. 그래가지고 같이 일을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품을 팔되 떠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와 함께 움직여요. 내면허가 필요한 곳에 가서 움직이는 거죠. 그래서 내가 '노가대'를 했으되 어떤 지적인 부분이 결합된 거예요."

점심을 먹고 나서 근무처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아들을 주기 위해 길가에서 운동화 한 켤레를 골랐다. 그는 아들에게도 늘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한다.

"공부로 승부하는 것은 늘상 긴장해야 되는 것이니까, 삶을 즐겨야 되는 거다. 그런데 삶을 즐기려면 될 수 있으면 오감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라. 오감을 가지고, 오감을 이용해서,그럴 때 삶이 행복할 것이다, 라는 걸 이야기 해주는거지요. 따지면 그런 거예요. 우리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사실은 큰 뭔가가 성취되어서 느끼는 거 보다는 작은 것들, 감촉되는 것들 내 앞에 있는 것들, 이런 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거 아닙니까?

누가 들으면 왜 자신을 한정시키느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난 내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해요. 자기 신분을 계층을 자각해라. 누가 들으면 요즘 세상에 계층이 어디있어? 라고 말하겠지만 난 어릴 때부터 계층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난 어릴 때 장사를 하면서 생의 이면을 봤거든요. 보니까 계층이 있단 말이에요. 공격적으로 자기계층을 상승시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거고 자기 계층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거란 말이지요.

이면우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개인취향이에요. 나는 나한테 주어진 것을 접수할거야. 접수하고 거기서 즐기면서 살아갈거야. 이런 거지요. 어떻게 보면 발전이 없는 건데… 그러니까 이것이 근대하곤 안 맞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난 내 삶을 굳이 근대로 밀고 가서 경쟁 속에다 놔두고 뭘 성취하는 거 보다는 전근대적인 삶을 통해서 심정적인 기쁨 같은 걸 맛보면서 살자는 주의예요.

아까 내가 전략을 갖고 산다고 이야기 하셨지요? 사실 난 어릴 때부터 전략을 생각했던 거예요. 난 그냥 온 거 아니에요. 전략을 세웠어요. 내가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내가 그 당시 17살 때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확실한 건 학교 선생님 정도더라고요. 내 스스로 자기를 놓고 보니까 학교 선생님 정도가 맞았어요. 능력에. 사실은 내가 개인적으로 갖는 심정중의 하나가 뭐냐면 서로 개인적으로 심정을 주고받는 건 좋아요. 그러나 두 세 사람이 있어 가지고 내가 뭔가 책임져야하고 결정해야 한다면 싫어요."

- 스트레스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시네요?

"네. 일종의 스트레스일 거예요. 그러니까 결정하는 것을 회피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안식구한테도 늘 하는 이야기가 그거예요. 안식구가 뭘 물어오면… 아 여보 그런 거는 당신 혼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내가 결정하게 되면 내가 너무 여러 가지를 결정해야 되는데, 우리 아들한테도 그렇고…"

"오감을 가지고, 오감을 이용해서 살아갈 때 삶이 행복할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진정한 노동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섣불리 꺼내놓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의 노동의 이력이 그만큼 탄탄하므로 그의 시의 구체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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