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솔닛은 이 미묘한 균형을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생각에 완전히 빠지지 않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12쪽)라는 말로 표현한다. <걷기의 역사>는 제목 그대로 걷기에 대한 책이고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면서부터 누려온 특권의 의미를 밝히는 책이다(오, 위대한 손의 자유여!).
솔닛은 걷기를 철학하는 행위로 승화시킨 학자들을 소개한다. 한번쯤 이름을 들었음직한 루소, 키에르 케고르, 훗설 같은 철학자들을 통해 솔닛은 걷기를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자 세계를 만드는 방식"(49쪽)으로 만든다. 우리는 걸어가면서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통해 내 존재와 내 육체를 확인하며 세계를 변화시킨다.
| | | 글쓴이소개 | | | | 레베카 솔닛 (Rebecca Solnit) - 예술, 문화 비평가 및 큐레이터이며 환경 운동가이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 덴버 미술관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하버드 디자인><아트 이슈>등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저서로는 19세기 문화를 다룬 <그림자의 강>, 도시의 환경문제를 다룬 <텅 빈 도시>와 <어떤 여행>, <황량한 꿈> 등이 있다.
김정아 -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석사를 마친 후 비교 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교수신문>문화부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센터 연구원 및 파리3대학 영화과 박사과정에 있다. 옮긴 책으로 <옥시덴탈리즘>을 포함하여 다수가 있다. / 알라딘 | | | | |
이처럼 걷기는 인간이 세계 속에 뿌리내리는 하나의 방식이기에 개인 존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일찍이 아렌트(H. Arendt)는 산책이 벤야민(W. Benjamin)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파리가 벤야민에게 산책이라는 19세기적 걸음걸이와 사고의 스타일을 가르쳤듯, 또한 그에게 프랑스 문학에의 감수성을 불러 일으켰고 그로 말미암아 그를 독일의 보통 지식인 생활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권영빈 옮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 지성사, 1983), 188쪽).
솔닛 역시 벤야민을 길게 언급하며 산책이
"상품과 여성을 시각적으로 소비하되 산업화의 속도와 생산에 대한 강요를 거부하는 양가적 인물로서, 새로운 상업 문화에 저항하는 동시에 그 문화에 매혹된"(314쪽) 독특한 철학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개개인의 걸음이 모이면 걷기는 사회 속에서 집단적인 힘을 형성한다. '함께 걷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집단적인 힘을 과시하는 좋은 방법이다(우리 사회에서도 촛불시위나 반전시위,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삼보일배를 예로 들 수 있다). 보통 함께 걷기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그 상태에 도전하거나 바꾸기 위해 실행된다.
그런데 '함께 걷기'는 행진과 다르다. 손과 발을 맞춰 행진하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는 좋은 방법이지만 개인의 '주체적인 걷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행진은 개개인의 육체의 리듬을 집단과 권위에 예속시킨다. 행진하는 모든 단체는 군국주의로 나아간다"(250쪽). 파시즘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행진을 자주 이용하듯이, 행진은 개인의 자율적인 욕망과 의식을 집단의 것으로 통합한다. 함께 걷기는 행진으로 변하지 않도록 항상 의식하고 경계해야 한다. 함께 걷기는 즐겁고 쾌활해야지 딱딱하고 규율화되면 안 된다.
솔닛은 단순히 '걷기', '걷는 행위'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계속 걸으려면 걸을 수 있는 공간을 지켜야 하고 그렇기에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우리가 걷는 공간은 대부분 사적 소유지가 아니라 공유지이기 때문에 공간이 줄어드는 것은 사적 소유의 확대와 공적 공간의 감소를 의미한다. 그래서 때로는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싸움을 벌이는 방법 역시 걷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공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대표적인 예로 솔닛은 공유지를 사유화했던 인클로저 운동에 맞섰던 영국 걷기클럽의 얘기를 들려준다. 영국의 노동계급은 토지의 사유화에 맞서서 산책할 권리,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불법을 무릅쓰고 사유지를 침범해서 산책을 했다. 솔닛은 이를 '도보 여행의 정치'라고 부른다.
"영국에 건너간 나는 무단 침입이 대중 운동이고 재산권의 범위가 논쟁의 대상인 문화를 발견하고 전율을 느꼈다. 걷기가 소유로 조각난 땅을 깁는 것이라면, 무단 침입은 정치적 전술로 땅을 깁는 것이다"(257쪽).
그리고 대부분의 '걷기'는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솔닛은 거리의 의미를 되찾자고 주장한다. 근대의 공간은 거리를 불안하고 위험한, 그래서 빨리 지나가야 하는 단순한 '통과공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집 밖에 나가는 게 무서워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를 잃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보여주는 세계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세계에서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거리를 소통과 만남이 가능한, 공개되고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 이런 전환은 새로운 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거리의 '배치를 바꾸는 것', 거리에서 축제를 열고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으로 공간과 시간을 연관시킨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산책을 하려면 걸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지만 걷기 위한 시간도 있어야 한다. 솔닛의 말처럼
"걷기가 퇴화하는 것은 걸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걸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사유하고 구애하고 백일몽에 잠기고 경치를 즐기던 분방한 명상의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기계에 속력이 붙었고, 삶이 그에 발을 맞추었다"(403쪽). 결국 솔닛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에 뿌리내리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결코 개인적일 수 없다. 드넓은 정원에서 혼자 조용히 거닐거나 개인적인 명상에 빠진 사람들은 걷기가 가진 '함께 하는 속성'을 은근슬쩍 지워버렸다. 그런 걷기는 새로운 야생지로 이끄는 걸음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한 곳만 맴도는 걸음이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제한된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적인 영역으로 한 발을 내딛을 때 우리는 경이로움에 눈뜰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는 발걸음에 새겨진 기억은 다른 또 누군가가 그 길을 더듬어 걸어가게끔 한다.
가지 않은 곳, 가지 못하게 막는 곳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욕망,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이끄는 발걸음이 있기에 길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아니, 끝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