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토기 전수자 강희주(57)씨는 자신을 '예술가'가 아닌 질그릇을 굽는 ‘쟁이’라고 불렀다.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을 예술이라고 하기엔 좀 쑥스럽지 않겠냐”는 것이다.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금산사에서 원평으로 나가는 길 중간 ‘오리알터’로 불리는 금평저수지를 타고 오른쪽 길을 타고 들어가다 보면 길을 막는 마을이 구릿골 동곡마을. 이곳에 강씨가 가마터를 잡고 백제 그릇을 굽고 있다.
동곡마을은 강씨가 가마터를 잡은 것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마을 유래가 있다. 이 마을은 1495년경 안동 김씨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 형성됐다고 하는데 당시 이 곳은 '그릇골'로 불렸다고 한다. '그릇골'이라는 이름은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던 곳이란 의미로 오래전 마을에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던 곳이었다.
실제 마을 뒤편에는 6∼7곳의 가마터가 확인되고 있으며 당시에 굽던 막사발과 대접 등의 조각들이 나오고 있다. 이 곳 가마터가 강씨를 부른 것은 아닐까….
마을앞 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른 쪽으로 제방을 따라 100여 미터쯤에 가든과 함께 나란하게 서 있는 조립식 건축이 그의 집이자 작업실이다. 가든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그의 집은 입구부터 옹기와 질그릇들로 만들어진 조형탑들이 길을 안내한다.
정원에 줄지어 세워 놓은 갖가지 형태의 커다란 옹기 위에 놓여진 질그릇들이 눈에 띤다. 마당 한가운데 화단에 세워진 탑들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멀리서 보면 검은 빛깔에 회색빛이 살기를 품은 것이 막 주물(鑄物)돼 나온 쇠같기도 하다. 다르게 보면 검은 돌을 깎아 만든 조각같다. 이것이 백제토기다. 정확하게 말하면 백제토기 방식의 현대 조형물이라고 해야 한다.
"백제토기를 재현했다니요. 언제 백제토기가 사라지기라도 했습니까?"
뜻밖이었다. "어떻게 해서 백제토기를 재현하게 됐냐"는 질문에 "대대로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다만 배가 고파 옹기쟁이로 오랫동안 외유를 해 만들지 않았을 뿐이란다.
충남 논산 채운면이 그의 고향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에 와 백제토기로 불리는 질그릇을 굽던 도공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백부 슬하에서 성장했던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어렸을 적부터 도공이어야 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세살 때부터 흙과 더불어 살았다. 그를 키웠던 백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술을 배웠고 유일한 생계방편이 됐다. 한 때 공주 갑사 인근 계룡면에 하마루로 불렸던 곳에 가마를 짓고 질그릇을 구워내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도공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열일곱살 먹던 해부터였다. 그 때는 그것이 백제토기라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논산과 공주 등 충남일대에는 질그릇을 굽는 가마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전통적인 백제토기는 실용성이 떨어져 상품성을 잃게 되고 돈벌이가 막힌 그들이 '옹기쟁이'로 변신하면서 백제토기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끼니가 급했던 그도 질그릇 굽는 일을 포기해야 했다.
제법 손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옹기쟁이로 전국을 떠돌았다. 전남 구례, 곡성, 제주도 등 옹기가마가 있는 곳이면 그의 밥벌이는 해결됐고 기술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이 때 각 지역마다 달랐던 옹기기술을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계기가 됐다. 이 덕분에 그는 전라도 퇫바퀴 태림과 너벙태림, 경기·충청지역 제기태림, 이북지역 치태림 등등 모든 옹기기술에 능통하게 됐다.
그리고 서른 여섯 살이 되던 해 김제 원평 제월리에 세워진 옹기가마 기술자로 왔다가 21년째 김제살이를 하고 있다. 원평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옹기쟁이로 혹은 옹기장사로 기억할 만큼 옹기는 그의 인생이었다.
그가 자신의 가마를 짓고 독립한 것은 10년전의 일이다. 그동안 옹기장사로 모은 돈으로 지금의 집과 가든식당을 짓고 음식점 주인으로 팔자를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는 팔자 바꾸기에 실패하고 만다. 경험없는 음식장사가 잘될 리가 없었다. 가든을 팔아 빚을 정리하고 지금의 집과 가마만 남았다.
이 때부터 처음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에게 배웠던 그릇들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 때 그 그릇들을 다시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서다.
TV드라마 왕건이 인기를 끌면서 처음 그가 선조들에게 배웠던 질그릇이 백제토기였음을 깨닫게 됐다. 드라마 인기 덕분에 왕건 잔으로 불리던 신라시대 술잔을 비롯해 드라마에 나오는 고대 그릇들을 재현해 재미를 보았다.
신라토기는 장식이 많고 화려한데 반해 백제토기는 밑이 둥글고 빗살무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백제토기를 질그릇이라고 했다. 점토가 재료라는 점은 옹기와 비슷하지만 불의 강약과 유약을 바르지 않는다는 것이 옹기와 다르다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질그릇은 마치 쇠처럼 은회색 빛이 돈다. 쌀을 담아 놓으면 벌레가 생기지 않고 물을 담아 두면 금방 마를 정도로 습기를 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백제토기뿐만 아니라 신라, 고구려까지 삼국시대의 모든 토기를 재현하는데 정렬을 쏟고 있다. 금산중학교 최상석 교감선생님은 박물관 도록과 고서를 찾아 그의 고대 토기 재현을 돕고 있는 든든한 후원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은 도예가가 아니라고 한다. 철저한 고증에 의해 제대로 고대토기를 만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다. 더욱이 남들은 백제토기의 현대화 작업이라고 추겨 세우지만 백제토기를 만드는 기술로 다른 그릇과 소품을 구워 생계를 꾸리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옹기쟁이에서 백제토기 도공으로 돌아간 뒤 그의 살림은 더욱 힘들어졌다. 백제토기 재현작업이 늦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들은 등잔과 화로 등 신라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교적 모양이 화려한 신라토기들이 장식용으로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경기가 악화돼 이마져 팔리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웅관과 그릇 받침대, 똥장군 등은 어느 정도 원형을 복원한 상태이다. 오는 10월 김제시의 도움으로 김제 지평선 축제에 작품전을 열게 돼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어렸을 적 실용성이 떨어져 옹기쟁이로 나섰던 기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백제토기의 실용성을 살리는 작업도 열심이다. 아직은 장식용 소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생활용기도 복원할 계획이다.
강씨의 고집스런 장인정신과 그의 가마에서 백제가 되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