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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만 남은 겨울나무. 그래도 봄이 되면 가지가 솟아나고 푸른 잎들이 달립니다.
몸통만 남은 겨울나무. 그래도 봄이 되면 가지가 솟아나고 푸른 잎들이 달립니다. ⓒ 정철용
계절이 더 깊어져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면 나무는 앙상한 빈 가지에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열매 몇 알만을 매단 채 마치 죽은 듯이 서 있습니다. 더러는 가지들이 모두 잘리고 몸통만 남은 끔찍한 모습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도 있지요. 눈이 내려 쌓이면 모를까, 사람들은 벌거벗은 나무에는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귀 밝고 눈 밝은 나희덕 시인은 화사한 꽃도 없고 무성한 잎들도 다 져버린 오동나무를 바라보면서 깜짝 놀랍니다. ‘크기는 크지만/ 반 넘어 썩어가는’ 그 오동나무의 빈 가지에 까치가 무려 스무 마리나 앉아 있는 것을 시인은 보았던 거지요.

분명 ‘그 나무도/ 물기로 출렁거리던 때/ 제 잎으로만 무성하던 때 있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희덕 시인처럼 새들이 내려앉은 그 빈 가지에서 ‘품’을 읽어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화사한 꽃의 향기와 곱게 물든 나뭇잎의 빛깔과 상큼한 열매의 맛만 탐할 뿐 나무에서 삶의 철학과 지혜를 구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지요.

시인은 그런 우리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빈 가지가 있어야지,/ 제 몸에 누구를 앉히는 일/ 저 아닌 무엇으로도 풍성해지는 일’이라고. 자기 것을 모두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남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품이 생길 수 있다는 시인의 이 전언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집니다.

화사한 꽃을 피운 봄나무. 그러나 벚꽃이 지고 나면 그 뿐, 꽃 진 자리에 돋아나는 잎새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화사한 꽃을 피운 봄나무. 그러나 벚꽃이 지고 나면 그 뿐, 꽃 진 자리에 돋아나는 잎새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 정철용
나는 과연 남들을 넉넉히 품어줄 수 있는 정도의 품을 가지고 있는지?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내와 딸과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에게 나는 저 오동나무의 빈 가지처럼 그들의 삶을 위로하는 쉼터가 되고 있는지? 내 이웃과 친구들에게 나는 따뜻한 위안을 주는 가슴이 되고 있는지?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면서 나는 얼굴이 붉어집니다. 많은 책을 읽어 아는 것이 많고 모아놓은 재물도 제법 되며 또 남들이 알아주는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 잎으로만 무성한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꽃피는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그러면 잎들도 조금씩 시들기 시작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의 열매도 결국은 땅에 떨어지고 말텐데, 그 무슨 아집과 자만과 독선과 욕심으로 우리는 아직도 가지를 채우려고만 드는 것인지…

짙푸른 녹색의 여름나무. 그 시원한 그늘 밑에서 매미 소리를 듣습니다.
짙푸른 녹색의 여름나무. 그 시원한 그늘 밑에서 매미 소리를 듣습니다. ⓒ 정철용
가장 아름다운 일은 아마도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저 아닌 무엇으로도 풍성해지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세상을 넉넉하게 안을 수 있는 품을 지니기 위해서는 제 잎으로만 무성한 가지를 빈 가지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사는 이곳 뉴질랜드는 이제 봄이 시작되어 거리마다 공원마다 봄꽃들이 눈부십니다. 한국에는 이제 가을의 문턱에서 나무들이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느라 바쁘겠지요? 그러나 봄에 피는 꽃이나 가을을 곱게 수놓는 단풍잎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바로 빈 가지입니다.

나무의 꽃들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를 지니게 된 것은 어쩌면 늦가을에서부터 이른 봄까지 빈 가지에 새들이 앉아서 들려준 노래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화려한 색깔의 가을 단풍잎들이 결국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빈 가지를 마련해서 새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를 듣기 위한 것일 테지요.

빈 가지가 아름다운 가을나무. 넉넉한 품이 있기에 꽃보다 단풍보다 아름답습니다.
빈 가지가 아름다운 가을나무. 넉넉한 품이 있기에 꽃보다 단풍보다 아름답습니다. ⓒ 정철용
빈 가지로 새들을 불러들이는, 그래서 그들의 온기와 노래로 더욱 풍성해지는 찬 바람 속의 한 그루 나무처럼 나도 그렇게 겸허한 자세로 내 품을 벌려 사람들의 숨결로, 그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세상 이야기들로 풍성해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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