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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둥이 녀석이 폐교에 쪼그리고 있다. 무얼 생각하는 걸까?
늦둥이 녀석이 폐교에 쪼그리고 있다. 무얼 생각하는 걸까? ⓒ 최성수
지난 방학 내내 저는 늦둥이 진형이와 보리소골에서 생활했습니다. 큰 아이가 고3이라, 아내는 뒷바라지 때문에 보리소골에 올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작년 겨울에는 혼자 며칠 있었는데, 참 쓸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 방학에는 늦둥이 녀석을 데리고 있으니 제법 마음 의지도 되고, 쓸쓸함도 덜했습니다.

처음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자 녀석은 밥상 앞에 앉아 침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엄마 보고 싶니?”
“예.”

녀석은 숟가락을 든 채 엄마 생각을 하는지 멍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그럼 내일 서울로 갈까?”

내 말에 녀석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 녀석이 더없이 귀여워 보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저녁의 일이 생각나 저는 다시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서울로 엄마한테 갈까?”

그러자 녀석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엄마가 보고 싶기는 하지만, 참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참으면 돼요. 금요일에 엄마가 오신다고 했잖아요.”

금요일에 내려오는 제자 아이들의 차편으로 제 엄마가 온다고 약속을 했던 것이 기억났나 봅니다.

녀석은 제 엄마가 오기까지 며칠을 잘 견뎌냈습니다. 밤이면 더 엄마가 보고 싶은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그래도 꾹 참아내는 녀석이 대견하기까지 했습니다.

밥투정도 않고, 찌개면 찌개 하나, 국이면 국 하나만 놓고도 밥 한 공기를 다 먹어치우고는 개울에 나가거나 모래밭에서 흙장난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김치를 먹어야 입이 개운해져요.”

녀석은 꼭 밥 한 숟가락을 남겨놓고는 김치를 집으며 그런 말을 했는데, 제 엄마가 녀석에게 해주던 말이었지요. 그만큼 엄마가 보고 싶으면서도 참아내는 녀석을 보면서, 저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설 자리를 찾아가는 게 성장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요일, 제 엄마가 오자 녀석은 깡충깡충 뛰며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렇게 방학 동안 저는 보리소골에서 늦둥이 녀석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밭에 나가 일을 하면 녀석은 혼자 책을 보고 흙장난을 하고, 괜히 화단과 풀숲을 휘적이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면 밭으로 쫒아와 시시콜콜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집 앞 도라지밭, 지천으로 피어 한 세상을 이루는 도라지꽃들
집 앞 도라지밭, 지천으로 피어 한 세상을 이루는 도라지꽃들 ⓒ 최성수
“아빠, 고추에는 왜 말뚝을 박아줘야 돼요.”
“오이는 왜 죽었어요?”

고추 지지대 박아 놓은 것을 보고, 또 줄을 잘 타고 올라가던 오이 넝쿨이 말라 죽은 것을 보고, 녀석은 그런 질문을 해댔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녀석은, 그러나 딱히 대답을 바랐다는 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개울가로 내달려 물장난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때는,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날입니다. 방학 동안, 내가 보리소골에 틀어박혀 있으니, 선생님들이나 친구들, 혹은 제자들이 몇 번 찾아왔습니다. 방학 내내 몇 번이기는 하지만, 그게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되니, 제법 자주 손님이 찾아 온 셈입니다.

“아빠, 오늘은 누가 안 와요?”

녀석은 한 며칠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런 질문을 하며 은근히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다 손님들이 오면 녀석은 제법 의젓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보리소골 안내를 해드릴게요. 저를 따라 오시면서 보리소골 구경을 하세요.”

그리곤 앞장서서 골짜기 속으로 사람들을 안내했습니다.

“이건 느티나무고요, 이건 벽오동이에요. 나무가 아주 크죠?”
“이 나무는 산수유인데요, 저 옆 헌 집에서 옮겨 심었어요. 이 나무는 팥배나무고요, 이 나무는 아빠가 마시는 술을 담그는 산사나무에요.”

녀석은 집 앞에 심은 나무부터 소개를 합니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무 이름이 줄줄 나오는 것을 보고 마냥 신기해했습니다. 사실 녀석이 아는 나무라야, 집 앞에 심어놓은 몇 그루뿐이지만, 그래도 나무 이름을 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특하기는 했습니다.

“여기는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여기는 선희바위랍니다. 전에 아빠랑 여기서 물놀이하고 라면도 끓여 먹었어요.”

녀석이 커다란 바위가 널빤지처럼 펼쳐진 물가에서 그렇게 소개를 합니다. 친구네 가족이 놀러 왔다가 바위가 좋은 물가를 보고는 친구 아내의 이름을 붙여 선희바위라고 농담을 했었는데, 녀석은 그것을 잊지 않고 그렇게 소개를 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집 뒤의 산책길을 지나 사래 긴 밭과 소나무 숲까지 다 안내를 하고 난 녀석은 그제야 제 할일이 끝났다는 듯, 손님들을 풀어주곤 했습니다. 그런 녀석을 보며 우리 집에 찾아 온 사람들은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방학 끝무렵, 우리 학교 임 선생님 부부가 하루 찾아왔습니다. 한동안 손님들이 뜸하던 터라 녀석은 반색을 하며 손님을 맞았습니다. 다른 때처럼 녀석은 보리소골 구석구석을 안내했습니다.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가며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고. 개울을 막아 비닐을 씌워 놓은, 녀석의 말로 아이스 성이라는 곳도 안내하고, 징검다리 건너 도라지밭의 눈부신 풍경도 안내했습니다. 작은 텃밭에서는 이것은 옥수수, 저것은 고추하며 설명도 했습니다. 나는 그저 옆에서 고추와 방울 토마토 몇 개를 따서 주었을 뿐, 안내는 녀석이 도맡았습니다.

텃밭에 심은 옥수수가 잘 자랐다. 늦둥이 녀석이 따먹을 날을 고대하던...
텃밭에 심은 옥수수가 잘 자랐다. 늦둥이 녀석이 따먹을 날을 고대하던... ⓒ 최성수
이곳저곳을 둘러본 선생님 부부가 집 앞 느티나무 아래 놓아둔 돌 평상에 앉아 쉴 때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보리소골에 들어오는 입장권입니다.”

늦둥이 녀석이 갑자기 느티나무 잎 두 개를 따더니 임 선생님 부부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입을 열었습니다. 얼결에 하나씩 받아 든 임 선생님 부부께 녀석은 다시 한마디했습니다.

“입장권은 다음에 오실 때 꼭 가져오셔야 돼요. 이 입장권이 있어야 보리소골에 들어오실 수 있거든요.”

녀석의 말에 임 선생님 부부는 느티나무 입장권을 한 장씩 소중하게 받아들었습니다. 그 나뭇잎은 꼭 늦둥이 녀석 손바닥처럼 작고 앙증맞게 생겼습니다.

나뭇잎 입장권 한 장씩을 든 임 선생님 부부가 차를 몰고 사라질 때까지 녀석은 마당가에 서서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마도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서 녀석도 사람이 그리웠나봅니다.

개학을 하고, 학교에서 다시 만난 임 선생님이 웃으며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리소골에서 가져오고 싶은 게 두 가지 있었어요. 하나는 향긋한 방울 토마토이구요, 또 하나는 선생님 늦둥이 진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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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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