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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년의 OOO -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 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떼들아!"

극성스럽게 새를 쫓던 할망구는 와삭와삭 풀발이 선 출입옷으로 갈아 입고 타작 마당에서 굿을 보고 있을 것이다. OO은 마을의 남녀노유,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보다.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 퍼지는 징소리는 타작 마당과 거리가 먼 최참판댁 사랑에서는 흐느낌같이 슬프게 들려온다. 농부들은 지금 꽃 달린 고깔을 흔들면서 신명을 내고 괴롭고 한스러운 일상(日常)을 잊으며 굿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최참판댁에서 섭섭찮게 전곡(錢穀)이 나갔고 풍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실한 평작임엔 틀림이 없을 것인즉 모처럼 허리끈을 풀어놓고 쌀밥에 식구들은 배를 두드렸을 테니 하루의 근심은 잊을 만했을 것이다.

이 날은 수수개비를 꺾어도 아이들은 매를 맞지 않는다. 여러 달 만에 솟증(素症: 채식만 하여 고기가 먹고 싶은 증세) 풀었다고 느긋해 하던 늙은이들은 뒷간 출입이 잦아진다. 힘 좋은 젊은이들은 벌써 읍내에 가고 없었다. 황소 한 마리 끌고 돌아오는 꿈을 꾸며 읍내 씨름판에 몰려간 것이다.

최참판댁 사랑은 무인지경처럼 적막하다. 햇빛은 맑게 뜰을 비쳐 주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 버렸을까. 새로 바른 방문 장지가 낯설다.

한동안 타작 마당에서는 굿놀이가 멎은 것 같더니 별안간 경풍 들린 것처럼 꽹과리가 악을 쓴다. 빠르게 드높게, 꽹과리를 따라 징소리도 빨라진다. 깨깽 깨애깽! 더어응응음- 깨깽 깨애 깽! 더어응응음- 장구와 북이 사이사이에 끼여서 들려온다. 신나는 타악 소리는 푸른 하늘을 빙글빙글 돌게 하고 단풍든 나무를 우쭐우쭐 춤추게 한다. 웃지 않아도 초생달 같은 눈의 서금돌이 앞장서서 놀고 있을 것이다.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주름살을 잊고 이팔청춘으로 돌아간 듯이, 몸은 늙었지만 가락에 겨워 굽이굽이 넘어가는 그 구성진 목청만은 늙지 않았으니까 웃기고 울리는 천성의 광대기는 여전히 구경꾼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리. 아직도 구슬픈 가락에 반하여 추파 던지는 과부가 있는지도 모른다.

"쯔쯔... 저 좋은 목청도 흙 속에서 썩을랑가?"

* 팔월 OOO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고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 팔월 OOO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 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에게는.

- 박경리, <토지> 중에서



1897년 팔월 한가위, 아침부터 아이들은 기쁨에 들떠 마을 길을 쏘다니고, 어른들은 실한 평작을 거둔 한 해 농사에 흡족해 하며 차례도 올리고 잔치도 벌이느라 분주하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이처럼 정겨운 한가위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책장을 몇 장 넘기면 이내 풍요와 여유로 흥청거리는 농촌 풍경에 드리워진 깊은 시름과 한숨을 확인하게 된다.

박경리의 <토지>는 100년이 지난 후에도 꾸준히 읽히게 될,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이다. 왜 <토지>를 읽어야 하는지 길게 부연하는 것보다 <토지>에 나오는 몇 구절을 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그중 한가위(추석) 묘사 부분을 뽑아 본 것이다.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이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뛰는' 모습, '힘 좋은 젊은이들이 황소 한 마리 끌고 돌아오는 꿈을 꾸며 읍내 씨름판에 몰려가는' 모습,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이는' 모습…. 이젠 좀처럼 보기 힘든 그리운 풍경들이다.

어쩌면 한가위(추석) 대이동은 고향을 찾아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몸부림, 잃어버린 옛 추억을 찾아 과거로 떠나는 기나긴 여정인지도 모른다.

박경리 <토지>는 우리 민족의 흙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삶이 고스란히 담긴 서민의 역사책이자 박물관이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애환과 질곡이 서린 한가위(추석)를 맞아 박경리의 <토지>를 꺼내 다만 몇 장이라도 읽어보길 권한다.

만약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서 <토지>를 읽는다면 길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정겹게 느껴질 것이다. 시골길 흙냄새를 맡으면 잃어버린 옛 정취와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흙 대신 콘크리트 바닥을 딛고, 흙냄새 대신 도시의 대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토지>는 이 땅을 일구며 살아온 우리들의 참모습을 일깨울 것이다.

[2019년/마로니에북스][완간판]New 박경리 대하소설토지[20권+토지인물사전]

, 마로니에북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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