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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도로 한가운데에 나앉은 모양으로 서 있는 동십자각의 현재 모습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주변의 풍경이었지 동십자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마치 도로 한가운데에 나앉은 모양으로 서 있는 동십자각의 현재 모습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주변의 풍경이었지 동십자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 이순우
그런데 어색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마치 교통의 섬을 이루듯 홀로 한길 가운데로 뚝 떨어져 나와있어 자동차들이 그 양옆으로 무시로 지나다니는 것 역시 그리 자연스러운 풍경은 전혀 아닌 듯하다.

돌이켜보면 동십자각에 연결된 궁장을 헐어내고 지금의 모습처럼 만들어진 것이 1929년의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때였으니, 그럭저럭 70여년을 훨씬 넘긴 시절의 얘기가 되어 버렸다.

총독부청사의 건립으로 궁장이 몽땅 헐려나간 뒤에도 동십자각(오른쪽 표시)은 그대로 남았던 반면 건너편의 서십자각(왼쪽 표시부분)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이 사진을 보더라도 전차선로가 지나는 탓에 궁궐의 서남쪽 모서리가 둥그스름하게 변해버린 상태라는 것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총독부청사의 건립으로 궁장이 몽땅 헐려나간 뒤에도 동십자각(오른쪽 표시)은 그대로 남았던 반면 건너편의 서십자각(왼쪽 표시부분)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이 사진을 보더라도 전차선로가 지나는 탓에 궁궐의 서남쪽 모서리가 둥그스름하게 변해버린 상태라는 것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의 서십자각이 버젓이 남아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왼쪽이 서십자각이고, 오른쪽이 광화문이다.
경복궁의 서십자각이 버젓이 남아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왼쪽이 서십자각이고, 오른쪽이 광화문이다.
하지만 동십자각은 그러한 몰골로나마 확연하게 그 존재가 남아 있는 것과는 달리 광화문 너머 저 건너편의 대칭되는 지점에 있어야 할 서십자각(西十字閣)은 그 흔적조차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경복궁의 서남쪽 모서리를 아무리 둘러봐도 그저 둥그스름한 담장이 이어지고 있을 뿐 그곳에 동십자각과 똑같은 문루가 서 있었다고 짐작할 만한 단서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럼 동십자각은 버젓이 남아 있는데 서십자각은 홀로 사라지고 만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기록을 뒤져보면 서십자각을 헐어낸 것이 딱히 언제라고 단정할 만한 명시적인 구절은 보이지 않았으나, 광화문 앞에서 영추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전차선로(電車線路)가 개설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때가 1923년 9월이었다.

차례대로 (1)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당시, (2)1926년초의 경복궁 배치현황, (3) 1929년 조선박람회 당시, (4) 1936년의 경복궁 배치현황이다. 처음 전차선로가 개설된 이후의 변화과정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어쨌거나 서십자각은 전차선로의 곡선통과로 철거된 반면, 동십자각은 직선선로의 개설로 간신히 철거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차례대로 (1)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당시, (2)1926년초의 경복궁 배치현황, (3) 1929년 조선박람회 당시, (4) 1936년의 경복궁 배치현황이다. 처음 전차선로가 개설된 이후의 변화과정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어쨌거나 서십자각은 전차선로의 곡선통과로 철거된 반면, 동십자각은 직선선로의 개설로 간신히 철거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동아일보> 1923년 9월 1일자에는 "조선부업품공진회가 열리기 전에 경성부에서 경성전기회사와 교섭한 결과 광화문에서 부업품공진회의 출구(出口)가 되는 영추문(迎秋門) 앞까지 전차선로를 연장하기로 했다"는 요지의 기사가 들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궁궐 서남쪽의 모서리부분을 전차선로가 어떻게 지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9일자 보도사진으로 조선부업품공진회의 개회에 맞추어 전차선로를 개설하기 위해 서둘러 서십자각에 연결된 궁장을 헐어내는 풍경이다. 우연찮게도 그 시절 이른바 '내지'에서는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조선인들이 대량학살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것은 서십자각의 모습을 담은 마지막 사진이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9일자 보도사진으로 조선부업품공진회의 개회에 맞추어 전차선로를 개설하기 위해 서둘러 서십자각에 연결된 궁장을 헐어내는 풍경이다. 우연찮게도 그 시절 이른바 '내지'에서는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조선인들이 대량학살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것은 서십자각의 모습을 담은 마지막 사진이다.
다시 <동아일보> 1923년 9월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 하나가 이어진다.

"경성전기회사에서 새로 광화문에서 영추문까지의 전차를 부설한다 함은 작일 보도한 바이어니와 설계내용을 대강 듣건대, 경기도청 앞에서 광화문선과 연락하여 단선으로 영추문까지 이르게 하는 것인데,

연장은 삼백 육십여 칸이며 총경비는 이만 원 가량이나 되는 바 현재의 길모양대로 전차길을 내려하면 길 굽이가 여러 군데가 되어 전차의 운전이 거북할 뿐만 아니라 궁장의 서십자각 부근은 길도 좁고 또는 굽이가 너무 심하여 궁장을 그대로 둔다하면 그 부근 인가를 철폐하여야 할 터인데 ...... 운운"

광화문에서 영추문으로 이어지는 전차선로는 개설이 논의된 지 한달 만에 완공되었다. 이 전차선로의 개통은 서십자각 철거의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광화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해태상이 철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광화문에서 영추문으로 이어지는 전차선로는 개설이 논의된 지 한달 만에 완공되었다. 이 전차선로의 개통은 서십자각 철거의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광화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해태상이 철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곡선으로 지나가야 할 전차선로가 직각형태의 궁궐 모서리 부분을 어떻게 지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다가 결국 서십자각 쪽의 모서리 일부를 헐어내기로 결정했던 모양이었다.

<매일신보> 1923년 9월 2일자에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런데 전차를 부설하는데 한가지 유감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광화문으로부터 영추문 앞까지의 도로는 경복궁장으로 말미암아 길이 모가 되어 있으므로 ...(중략)...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로 하릴없이 역사의 한가지 유물되는 경복궁장을 약 육십 칸 길이로 파괴하여 선로를 만들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한다. 또 파괴한 궁장 뒤에는 우선 간이공사로 궁안을 감출만한 담을 쌓을 예정이라 한다."

그해 10월 5일에 열리기로 예정된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에 때를 맞추어 전차개통을 하려고 했던 탓인지 선로부설공사는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 즈음 이른바 '내지'에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인해 빚어진 참상이 속속 전해지고 있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궁장을 헐어내는 작업은 지체없이 이루어졌던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때의 궁장철거공사와 더불어 서십자각을 헐어내는 공사도 한꺼번에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는 단언할 수 없지만, 1926년 초에 작성된 '박물관관람안내도'에는 서십자각의 존재가 사라진 것으로 표기되어 있어 대충 그 시기를 짐작할 만하다.

광화문과 영추문 사이에 전차선로가 개통되면서 광화문 해태 역시 1923년 10월 2일에 제자리에서 걷어내어 지는 수난을 당했으니 의외로 전차의 위력은 대단했던 셈이다.

그런데 동십자각 쪽은 전차노선의 개설과 전혀 무관했던 것일까? 천만다행으로 나중에 동십자각 방향으로도 전차선로가 부설되기는 했지만 광화문 쪽에서 안국동으로 곧장 이어지는 직선선로만 개설되는 통에 간신히 철거되는 위기에서 살짝 비켜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행여나 광화문에서 삼청동 쪽으로 꺾어져 전차선로가 개설되는 일이 벌어졌더라면 동십자각 역시 철거되는 위기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지 않았겠나 싶다.

1929년 4월 22일, 그날 진명여학교 학생들을 가득 태운 전세전차가 전복되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서십자각을 헐어낸 곡선코스, 바로 그 지점이었다. 당시 <중외일보>에 보도된 사고기사를 보면, 나중에 여류시인이 되는 '노천명(盧天命)' 학생의 이름(붉은 표시부분)이 부상자명단에 들어있는 것이 이채롭다.
1929년 4월 22일, 그날 진명여학교 학생들을 가득 태운 전세전차가 전복되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서십자각을 헐어낸 곡선코스, 바로 그 지점이었다. 당시 <중외일보>에 보도된 사고기사를 보면, 나중에 여류시인이 되는 '노천명(盧天命)' 학생의 이름(붉은 표시부분)이 부상자명단에 들어있는 것이 이채롭다.
더구나 1925년 9월에는 안국동, 중학동, 간동, 팔판동,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 적선동으로 이어지면서 경복궁을 포위하는 전차순환선을 개설하려는 시도가 구체화된 적도 있었다. 그나마 이러한 계획이 무산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실행되었더라면 동십자각 역시 서십자각처럼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질 뻔했던 것은 아니었나 모르겠다.

이제 서십자각이 전차선로의 개설과 더불어 영영 사라져버린 지 그럭저럭 8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1990년 이후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경복궁 복원계획과 더불어 광화문과 영추문과 서십자각의 원형복원을 위한 논의도 한창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서십자각의 원래 모습을 제대로 담아 놓은 사진자료 하나 변변하게 남아 있질 않으니 앞으로 복원될 서십자각은 그저 동십자각의 복제품 신세를 면하기는 정녕 어려울 듯 싶다.

서십자각 연결궁장 철거 관련기사

<동아일보> 1923년 9월 2일자에 "영추문선 전차는 궁장을 헐고 십자각 뒤로, 광화문 앞 돌난간도 일부는 헐리게 될 모양이라고", "장차 추성문(秋成門)까지, 그편으로는 학교도 많고 교통이 복잡하므로 이왕부터 생각하여 오던 계획" 제하의 기사가 남아 있다.

경성전기회사에서 새로 광화문에서 영추문까지의 전차를 부설한다 함은 작일 보도한 바이어니와 설계내용을 대강 듣건대, 경기도청 앞에서 광화문선과 연락(連絡)하여 단선(單線)으로 영추문까지 이르게 하는 것인데, 연장은 삼백 육십여 칸이며 총경비는 이만 원 가량이나 되는 바 현재의 길모양대로 전차길을 내려하면 길 굽이가 여러 군데가 되어 전차의 운전이 거북할 뿐만 아니라 궁장의 서십자각 부근은 길도 좁고 또는 굽이가 너무 심하여 궁장(宮墻)을 그대로 둔다하면 그 부근 인가를 철폐하여야 할 터인데,

이 같이 함은 그곳 주민에게 막대한 손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경비도 더 드는 까닭으로 총독부 당국과 교섭한 결과 서십자각으로부터 광화문 쪽으로 오십 칸, 영추문 쪽으로 열 칸 길이의 궁장을 무너버리게 되었으며 광화문 앞에 있는 돌난간도 다소 헐릴 터인데 이에 대한 비용은 전부 경성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는데 공사는 각 관계당국의 양해가 있으므로 금명간에 곧 착수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부업품공진회가 개최되기 전에 완성하여 일반의 편리를 도모할 작정이라더라.

이에 대하여 경성부윤은, "궁장을 헐어버리는 비용을 경성부에서 담당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올시다. 경비가 얼마나 될지는 아직 확정하지 아니하였습니다마는 궁장을 헐고 다시 경복궁 쪽으로 조그마한 담을 쌓아야 할 터이므로 (장래에는 없애야 할 것이지만은) 적지 아니할 것이올시다. 그런데 이번 전차길은 특히 공진회를 위하여 부설하는 듯이 말하는 이도 있는 듯합니다마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계획은 벌써부터 있던 터이외다.

원래 계획으로 말하면 영추문은 오히려 추성문 부근까지 하려던 것이외다. 실상 그 부근에는 제2고보, 진명여자고보, 청운, 매동 등 보통학교가 있으므로 교통이 매우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래 교통기관이 불완전하여 일반의 불편이 막심하므로 부에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중에 경전에서 그곳에 전차를 부설할 계획이 있고 겸하여 공진회가 열리게 됨에 이 기회를 타서 그곳의 교통기관을 위하여 도와줌에 불과한 것이올시다"는 의미로 말하더라.

동십자각 연결궁장 철거 관련기사

▲ 1929년 조선박람회 당시에 동십자각에서 광화문(해체이전후) 방향으로 이어지는 연도의 풍경이다.

<매일신보> 1929년 5월 11일에 "동십자각(東十字閣) 모퉁이 도로를 대확장, 박람회 입장자 위해 십자각은 노중(路中)에" 제하의 기사가 남아 있다.

금추(今秋) 개최할 조박(朝博) 준비는 착착 진행중인데 박람회 개회간 중은 약 이백만 명의 관람자가 회장에 출입될 예상이므로 총독부 정문전 전차정류소로부터 박람회 정문이 될 광화문까지 노면이 협소하야 다수인의 교통이 불편한 점이 불소(不少)하겠으므로 본부청사 동측에 재한 왕궁시대에 축조한 조선식 장벽을 전부 철거하고 현재 본부사용 정구장에 달하기까지 도로를 확장하여 대중의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로 되었으며, 따라서 동남모퉁이에 있는 십자각은 조선식 색채가 있는 건물인 고로 존치하게 되었는데 우(右) 건물은 확장된 도로중앙에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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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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