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가면 꼭 만나고 싶은 농민이 있다. 조제 보베(51세)라는 분이다. 프랑스 라자크 지방에서 양을 키우며 양젖 치즈를 만드는 평범한 농민이었는데, 1999년 8월, 그는 일약 세계적인 농민운동가로 부상되었다. 세계적인 다국적 회사인 맥도날드를 상대해 프랑스 농민 조제 보베가 다윗의 기개를 전 세계에 떨쳤기 때문이다.
그는 신축중인 맥도날드를 선제공격했다. 매장에 뛰어 들어가 건축자재를 뜯어다가 도청앞 광장에 쌓아버렸다. 이 사건은 프랑스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반대한다’는 반미명분을 이끌어 냈다.
시라크 대통령도 “나는 맥도날드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보베의 손을 간접적으로 들어 주었다. 보베는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방 생활을 했는데 거기서도 “성장호르몬이 투여된 나쁜 먹을거리를 강요하는 다국적 식품기업의 횡포, 세계화와 신자유무역주의에 함몰된 음모”를 당당히 폭로했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는 “선진국들은 더 이상 개도국의 팔을 비틀지 말고, 소농을 보호하라”며 농업의 세계화를 비판했다.
보베는 국내언론에도 자주 소개되었다.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에 ‘농민운동가-보베’ 기획을 몇 번이나 시도했었다. 어떻게 그가 세계 농민의 존경을 받는 세계적인 농민운동가가 됐고 또 그의 농민철학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 그는 행동하는 순수농민운동가이었다. "농업은 감동이다“라는 말을 나는 자주 쓴다. 저서 ‘신PD도 언젠가는 농촌간다’라는 책 서문 첫 번째 줄에도 언급되었던 문구다.
사실 내가 농업계로 들어 온 것은 농촌에 농민을 만나면서다. 진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던 농민께 ‘몹시 존경 함’의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경해(56세)란 분이 있다. 우리 농업계에선 잘 알려진 분이다. 나는 그에게 ‘몹시 존경 함’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를 몇 차례 만났었다. 혹시 이경해가 한국의 조제 보베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늘 농가부채라는 어려운 문제를 지니고 다녔다. 내가 제시한 ‘쌀나무’프로젝트에도 늘 걱정을 해 주었다.
내가 그를 조제 보베라 생각하는 것은 순수한 ‘행동’이 그에 가슴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행동하는 농민운동가였다.
13년 전,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TO 본부. 본부 로비에 한국의 한 농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농민은 한국 농업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WTO 아더던켈 사무총장을 만나고 나오다 주머니에 숨겼던 칼로 할복을 한 것이다. 이경해였다.
그 당시 우루과이(UR) 협정은 우리농업의 둑이 무너진다 해서 이에 반대하는 온 국민의 함성은 꽤나 높았던 시기였다.
“아더던켈 사무총장을 만나면서 몇 번이나 칼이 배에 갔는데 도저히 용기가 없었어요. 그런데 만나고 나오다 로비에서 환상이 보였습니다. 여의도에서 UR을 반대하는 우리 농민의 함성이었어요. 우룽쾅쾅 날벼락을 쳤지요. 순간 이 한 몸을 우리 농업에다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든거지요.”
그는 정신을 잃고 10시간 만에 깨어났다고 한다. 이 사건은 우리 농업의 공감대를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43조원이라는 막대한 정부예산이 농어촌 구조개선사업에 들어가는데 일조를 했다.
이경해의 고향은 전북 장수다. 한때는 험한 산간을 개간해 젖소 75마리를 기르기도 했다. 농민의 얼굴도 아닌 듯한 그의 인상은 참 해맑다. 초대 한국농업경영인협회장을 맡았고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가냘퍼 보이는 몸매로 언제 만나도 우리 주제는 농업, WTO와 쌀과 우리농민단체의 운동방향이었다.
올해 그는 또 할복했던 그 장소, 스위스 WTO 본부에 다녀왔다. 2003년 2월 22일. 혼자였다. 모든 부담은 개인이 했다. 우리 한국대표들이 가기 전이었다. 24일부터 제네바 WTO 정문 앞에서 텐트를 치고 13일간 단식에 들어갔다.
“Who kills farmers 누가 우리 농민을 죽이는가?”
그는 가슴에 칼을 걸고 우리 농업의 어려움을 세계에 알렸다.
“무척 추웠습니다. 준비해간 텐트와 침낭은 어림없었습니다. 매트리스 3장과 침낭을 하나 더 사서 추위를 견뎠습니다.”
농성 3일째 되던 날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국의 농민단체들과는 별도로 그는 5월 2일 귀국하기 전날까지 텐트 생활을 고집하며 일인시위를 계속했다.
영문으로 번역된 유인물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한국에서 온 농민이며… 결국 실패만을 거듭한 많은 농촌지도자 중에 하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우루과이 라운드를 통해 곧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더 이상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허구적 논리와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찬 WTO 농업협상은 그만하라.”
이경해의 WTO 정문 앞 1인 시위는 스위스 국영방송에서 취재해 4회에 걸쳐 나갔다. 라디오 방송, 각 스위스 신문도 큰 관심을 보여 주어 스위스 국민의 따뜻한 격려를 받았다.
월드뱅크 일일보고 뉴스 한토막-
But alone South Korean farmer has perhaps attracted more attention. For the past four weeks, the 56-years-old has been camped in an igloo tent on the pavement outside headquaters. Wearing a "who kills Farmers"
그는 이 시위를 통해서 WTO 사무총장 수파타이를 만났고 특히 2001년 시애틀에서 명함을 주고받았던 조제 보베를 만난 것이다. “보베는 첫 인상이 순하면서도 강한 인상이지요. 영어가 유창한데 저런 사람이 세계적인 농민운동가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베는 스위스 농민단체 회장과 함께 이경해 텐트를 찾고 250유로(우리돈 25만원)를 주고 갔다. 또 보배의 배려로 전 세계 농민단체와 시내까지 트럭시위를 감행하기도 했다.
이경해. 한국의 조제 보베다. 비록 돈도 없고 조직도 없지만 늘 순수한 마음이 농민에 쏠려 있다. 그가 요즘 숨을 고르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옥수수 사료작물을 심어 우리 한국에 공급하는 일이다. 대안농업의 시작인가?
| | 한국의 농민운동가 이경해를 추모함 | | | | 아니겠지요.
가시다니요. 아니겠지요.
암울한 우리 농업을 뒤로하고 가시다니요.
그날은 한가위
햇과일에 햅쌀송편 먹는 추석명절이었습니다.
새벽 6시
TV에 날아든
‘한국농민 WTO반대 할복 중태’
혹시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경해, 당신이었습니다.
한해농사를 감사하는 날
이게 무슨 참변입니까?
희생이었습니다.
하루걸러 내린 비로 들판에 벼는 쭉정이인 채
사과, 배는 저온으로 한해 농사를 망쳐 버린 뒤였습니다.
집채만한 태풍 ‘매미’가 한국농촌을 향해 질주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당신은
밀려오는 WTO 백만대군을 홀로 막고 길을 달리했습니다.
멕시코로 떠나기 전 당신은 말했었지요.
“누가 우리 농민을 죽여!”
“WTO는 우리 농민을 죽이지 못해!”
그러시면서 조용히 칸쿤에서 선보일 무기를 주문했지요.
‘WTO kills Farmers'
하지만 저는 함께 가자는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이해를 못했지요.
왜 자비를 털어가며 칸쿤으로 가야하는지.
올봄 2월에도 당신은 제네바 WTO본부에서 WTO를 반대 했지요.
단식투쟁을 2주씩이나 하면서
세계가 놀랐지요.
그때도 당신은 혼자였고 모든 경비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농업을 사랑하기에 가능했습니다.
제주도에 초강력 태풍이 몰려옵니다.
1959년 ‘사라’태풍보다 강한 태풍이라고 전국이 초긴장 입니다.
피해는 크겠지요.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빠져나갈 겁니다.
2004년에 밀어 닥칠 태풍 WTO가 문제입니다.
단군 할아버지 이래 처음 맞는 초강력 태풍입니다.
아직 대책은 없습니다.
우왕좌왕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WTO가 우리 농업의 뿌리가 뽑아버려도
FTA가 해일이 되어 우리 농촌을 덮친다 해도
우리 농업을 죽이지는 못 합니다.
이제 고품질 농업, 수출 농업이
당당히 세계농업과 맞서 싸울 겁니다.
태풍이 거치는 날
이제 우리농업은 희망입니다.
고히 잠드소서.
2003년 9월 12일 신동헌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