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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culture)란 자연(nature)과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능력을 통해, 순수한 자연 위에 쌓아올린 모든 것을 통칭하며 지식, 신앙, 예술, 법률, 제도, 도덕, 관습 등 삶의 모든 양태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총체를 일컫는다.
문화는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정서의 굽이 도는 지점에서 이질적인 다른 문화를 만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화·발전을 해 왔다. 특히 이질적인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발달된 문화는 그렇지 않은 다른 문화 위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해방 이후 우리 문화는 서구의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문화 정체성이 변했다. 그러나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문화는 배타와 접근의 상호모순을 반복하며 스며들듯이 국민정서에 조심스러운 정착을 유도해야 했다.
일본의 문화는 한국 문화와 달리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실용주의 경향과 자문화를 옹호하는 국수주의 경향의 문화적 특성을 지녔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미국의 점령정책으로 형성된 포용과 개방의 산물을 전후 복구의 기회로 삼았다. 봉건 사회와 군국주의 굴레를 타파하고, 자유로운 표현과·평등한 사회관계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를 허용하고 발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전후 점령기의 이러한 정책의 영향을 받고 형성된 일본문화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대중매체 발달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적 긴장의 해소수단으로 대중문화를 크게 번창시키게 되었다. 작은 것을 추구하는 일본문화는 점차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으며 그 중 하나가 한국인의 여가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노래방 문화다.
거의 옹고집 수준인 한국인의 정서상 일제 강점 36년 동안 겪은 일제 식민지 생활의 앙금은 일제강점의 잔존문화를 제거한다는 차원과 국민감정의 논리에 따라 일본문화에 대한 인위적인 장벽이 형성되어 있긴하지만 세계화, 개방화의 물결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러한 대세에 편승해서 들어온 상업주의의 소산인 노래방 문화는 본토인 일본의 가라오케 문화와는 또 다른 형태로 우리사회에 깊숙히 뿌리를 내렸다.
굴절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 질곡을 거치면서 표면적으로는 가려져 있던 우리 민족의 전통, 즉 가무를 즐기는 민족성을 자극하면서 급속한 속도로 정착하게 되고 또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문화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유입된 문화 중에 가장 빨리 그리고 폭넓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노래방 역사의 근원을 일본문화에서 찾아 본다.
일본 문화의 여러 장르 가운데 하나인 ‘엥까’는 일본 대중가요를 지칭하는 일본국민정서에 부합되는 음악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국민들이 거리에 나와 부르던 노래로 일제 36년 동안 일본이 강요한 산물 중 하나로 우리나라로 치면 나라잃은 백성의 한을 달래던 뽕짝이나 트롯트와 맥을 같이 했다.
대중가요문화의 주류를 이루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뽕짝'과 '트로트'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구절 쯤은 흥얼거릴 수 있는 국민의 가요가 되게 한 일등공신은 노래방 문화가 없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대변혁이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가라오케가 되었다. 노래 없이 반주만을 녹음하여 이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대중오락의 한 형태인 가라오케는 일본어로 '비어 있다'의 '가라'와 오케스트라(관현악단)의 '오케'를 합성한 일본인들의 실용 언어로 '노래가 없는 오케스트라'라는 뜻이기도 하며 노래 없이 반주만 녹음된 테이프나 디스크 또는 그 연주장치를 뜻하기도 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가라오케는 즉석 반주나 녹음된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한을 풀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기로 자리매김을 했다.
영상매체의 발달로 1990년 무렵부터 노래 가사와 반주가 화면에 함께 나오고 노래 부르는 사람의 모습이 비디오 화면으로 펼쳐지는,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뀌는 노래방음악으로 변모했고, 이것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국민의 생활패턴까지 바꾼 노래방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노래방 문화가 유입된지 십년. 그동안 국민의 정서에 노래방이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정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조명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노래방이 국내에 처음 선보였을 때 국민들은 분출의 욕구를 생각했다. 반 만년 역사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리는 것도 부족해 멀리는 당쟁과 사화를 반복하며 지쳤고 가까이는 6·25라는 민족의 대환란을 격고, 더 가까이는 유신과 군사정부를 거치면서 말을 잘못하면 삼족이 고통을 받는 살얼음 같은 환경에 길들여졌다.
하고싶은 말을 못 하면 병이 되고, 병을 다스리지 못하면 한으로 남는다. 안으로 한이 쌓인 민족이긴 하지만 천성이 노래를 좋아하는 가무에 능한 백성이 우리의 민족성이다.
더구나 우리 조상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 한과 끼가 어우러진 민족이라서 타령으로 분출할 필요도 있었지만 농경문화가 가진 생산의 극대화라는 필요에 따라 일과 놀이를 구분할 필요도 있었다.
가무문화는 하늘에 제를 지내던 제천행사의 모습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도 있다. 삼한 사람들의 춤에 대한 기록을 인용해서 조상들이 가무에 가졌던 발자취를 잠시 찾아보면, "춤은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 서로 따라가며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자세를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데, 손발이 함께 잘 어울렸으며 가락의 변화는 마치 탁무와 같았다”라고 기술했다.
힘든 농사일을 마치고 난 후에 모든 사람이 어울려 축제를 즐기는데 춤과 가락은 빼 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濊)의 무천(舞天) 등이 그런 축제의 예다. 힘든 농사일과 휴식 사이에서 형성된 농경사회의 풍속으로 씨뿌리기가 끝나는 5월과 추수가 끝난 10월에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온 나라 사람이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겼다.
그동안 농사일로 지쳐 있는 몸을 풀며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축제를 즐기고, 농사 짓는 일이 하늘에 달려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늘에 감사드리고 아울러 다음해의 농사도 잘 되기를 빌었다. 이것은 풍년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의식으로 뒷날 5월 단오와 10월 상달의 풍속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엄격한 유교 규율과 양반계급은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전통을 억제하고 죄악시했다. 선비들의 풍류라는 것도 스스로 노래와 춤을 통해 즐기기보다는 노래와 춤을 보고 즐기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백성은 즐기는 가무자체도 타인의 눈을 의식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영향을 받은 민족성은 근대에 이르러 일제의 지배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정서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기회와 의지는 점차 약해져 갔다.
이런 민족의 저변을 타고 유입된 노래방은 시대 흐름과 맞물려 국민의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았고 잠재된 끼를 되살려 놓았다.
가정 내에서 모든 문화 욕구를 해결하던 예전과는 달리 점점 가정밖에서 문화 욕구를 충족하면서 가족간 지인간 화목과 친목을 다지는 장소로 노래방이라는 공간을 십분 활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가슴 깊숙히 맺혀있는 응어리를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노래방은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과 적은 비용을 지출해서 일과에 지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처럼 노래방 문화는 국민의 생활패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중음악의 다양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자신의 정서와 공감대를 제공하는 노래를 들으며 혹은 힘든 노동과 생활에 지쳐 흥얼거림을 노래방이라는 공간에서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노래방 문화를 통하여 예전보다 더 많이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것으로 국민 전체의 음악성이 향상되었다고 평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중가요 위주라는 한계성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기고 감상하고 발전시키는데 저해 요인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주제넘은 생각도 해보지만, 전체적으로 노래방 문화가 특정계층의 전유물에서 대중음악으로 자리잡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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