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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에 있는 금산에 다녀왔다. 금산은 해발 681미터로 높다고 볼 수 없는 산이나 38경이 빼어난 곳이라고 했다
금산의 원래 지명은 보광산이었다고 했다. 신라의 거승 원효대사가 금산에 절을 세우고 보광사라 이름 지어 보광산이었으나 고려말 이성계가 이 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릴 때 개국하게 되면 산 전체에 비단을 둘러주기로 약속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성계는 백일기도의 약속대로 왕조를 세운 후 비단 금(錦)자를 써서 산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해 하면 금산이란 지명 보다 금산사나 보리암을 더 쉽게 떠올린다. 보리암은 남해대교와 함께 남해를 대변하는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제주도, 거제도, 완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네번 째 큰 섬인 남해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였다. 15일 밤 8시에 등산복장을 하고 버스에 오른지 여덟 시간 만이다. 비단 대신 어둠이 두른 금산 자락의 새벽 공기가 맑았는지 흐렸는지 잘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술이 술을 마실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이 마셨다. 같이 간 일행들이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고 이 사람이 한 잔, 저 사람이 한잔씩 주는 것을 마시다보니 그렇게 됐다.
술자리는 새벽 3시경에 끝났지만, 서서히 오르던 취기는 산에 오르기 시작한 4시쯤에는 이미 만취상태가 됐다. 덕분에 고생을 좀 했지만 우리나라 삼대 기도 도량이라는 보리암에 걸맞게 진입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지난 가을 설악산 야간 종주를할 때도 술에 취해 올랐는 데, 그 때 비하면 이번 산행은 등산이 아니라 여행이었다.
새벽 5시, 새벽은 바다에서 보내주는 안개로 감겨있어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산새들이 아침을 여는 소리가 꽤 시끄러웠지만 듣기는 좋았다. 보리암을 왼쪽으로 두고 정상 망대에 오른 시간이 새벽 6시 경, 하늘엔 해가 떳음을 알리는 붉은 구름이 보였지만 해는 보이지 않았다. 발치아래 가까이에 상주해수욕장이 평화스레 보였지만 그 이상의 거리는 미쳐 거두지 못한 안개로 더이상 볼 수는 없었다.
작년 여름 친구가 전화로,보리암에 왔는데 경치가 참 좋다라고 했던 말을 떠 올렸다. 그때 난, 양평 서종리에 있던 시간이었다. 남해에는 금산사가 있고 보리암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안 날로 부터 열달 정도가 지난 후 친구가 섰던 자리에 내가 서 있게 될 줄은 몰랐다. 가끔 주문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있을 때 필연과 우연의 간극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어디가 좋다는 거지'
친구가 좋다고 말한 장소를 찾아보고 싶었으나 덜 걷힌 안개 탓인지, 그동안 접한 많은 경치를 뇌리에 입력시키고 사는 탓인지 특별하게 좋다는 느낌은 없었다.
난 가슴에 품은 열정이 많은 사람이다. 치열함이 없으면 차라리 하지않음만 못했다. 때로는 어쩌지 못하는 자기연민으로, 때로는 헐떡이는 분노로, 가끔은 자기 파괴로, 그러다 한번 정도는 자연의 섭리를 깨닭아보기 위해 많은 산을 올랐다. 아마 그 동안 오른 산을 꼽으면 300개 정도는 넘지 않을까 싶다
산에 오르는 것이 어느 날부터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산에 오를 때면 꼭 험한 쪽을 고집했다. 숨이 턱에 달만큼 힘들었거나, 죽을 뻔했다거나, 가시덤불을 해집고 다니지 않은 날은 등산을 해도 개운하지 않았다. 미친 듯이 달리거나 10미리 자일에 몸을 맡기거나, 절벽을 건너뛰며, 나를 버리고 싶은 그 무엇이 있을 때는 안도를 한다.
어지간한 치열함으로는 나를 달랠 수 없다. 열정으로 포장된 분노를 푸는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치열함을 어제는 술이 대신해 주었었다. 술을 마시면 피가 빨리 돈다. 술을 미시고 산에 오르면 심장에 가속도가 붙어 고동이 빨라진다. 거친 숨을 토해내도 심장은 금방 터질 것처럼 펌프질을 하고 세상이 돌고 산이 돌고 바위가, 숲이 따라서 돈다. 도는 중심을 따라 개처럼 긴다.
개처럼 기어야 할 때
편한 생각에 길들여진 나는
간사하기 그지 없어
등 따습고 배부를때만
사람답게 사는 법을 생각하지만
바위 산에 오를 때면
언제나 개 같은 생각만 하고
개답게 기는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다
절대로 기어 다니지 않고
허리 굽히지 않겠다고
코 평수 넓히고 킁킁 거리지만
그것은 평지에서만 통용되는
알량한 몸짓 이다
절벽 닮은
길없는 길 오르다 보면
발 보다 손이 더 편하고
급하면 저절로 네 발로 기는데
두 발로 걷는게 무슨 자랑이라고
개처럼 기고 싶냐고 큰소리 첬는지.
술은 이미 깨었다. 열정을 태우고 난 뒤의 세상은 윤곽을 드러낸다. 자신과의 싸움과 타협을 하고 나면 폭풍이 지난 뒤의 고요함이 정물로 찾아온다. 일행과 떨어져 천천히 쌍홍문이 있는 등산로 쪽으로 하산을 했다.아침 예불을 드리러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가벼운 목례를 했다.
몇년 전 새벽, 동이 트기 훨씬 전에 전남 영암에 있는 월출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도갑사를 지날 때, 어둠의 한 켠에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스님이 아침을 여는 종을 치는 것을 보았다. 퍼져 나가는 종소리를 가까이서 접하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었다 몇 달 뒤. 그때의 느낌을 기초로 해서 "산사에서 1" 과 "산사에서 "2" 라는 시를 만들기도 했다.
둥그런 숲과 하늘을 보았다/ 정지된 화면 보이지 않는 것은/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볼 수 있듯이/움직이지 않는 것도 관념으로 남은 실체였다/도둑처럼 스며든 어둠은/일용할 양식에 허기 진 / 먹이 찾는 짐승의 핏발 선 안광에 힘이 실릴 때 /헐떡이는 신음은 동녘이 트기 전/어둠이 지배하는 시간만큼/ 절벽마다 건너뛰며 생채기를 냈다/중이 고기를 먹으면 왜 안 되는지 밤새 화두가 되어/젊은 스님의 가슴앓이에 /알 수 없는 분노와 알려해서도 안될 슬픔이/촛농으로 녹아들었다/ ...../....../ 종을 치는 팔뚝이 꿈틀거리며 새벽을 불렀다/아침이여 오라/밤 새 울부짖으며 떠돌던 언어들이 아침이라 말했다, 아침,, 새벽,,아침/
외롭게 늙어 허물을 벗는 소나무 마디를 따라 눈길을 주면 하늘 틈으로 갈기갈기 찢기어 걸린 솔잎의 웅얼거림을 들을 수 있다. "역사는 마디가 없는 거야, 사람들이 만든 거지" 한산대첩도, 노량해전도, 이성계도 사람의 기록일 뿐이지 자연의 기록은 아니다. 이끼가 집을 짓다 포기한 겹친 바위틈으로 손을 넣고 자세히 보면 꼭 살아서 숨을 쉬는 생명들이 있었다.
생명은 확인을 전제로 존재라는 것은 아닐까. 왔다 가는 것에 대해 겨자씨 만큼이라도 관심을 받은 생명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면 비약일지도 모른다. 굴참나무와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곰스러운 우직함과, 아직 가시를 만들지 않은, 검은 산초열매를 맺는 하얀 꽃잎의 부드러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오니 사람들은 아침 준비로 매운탕을 끓이고 있었다.
공용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꺼칠했다. 밤사이에 자란 수염을 깨끗이 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객지에서 무슨 사치스런 생각인가. 거울 속의 나는 씩 웃고있었다.
"쇼윈도에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어디서 보았더라/ 쾡한 눈 낮 설지 않다/..." 는 "증오"라는 시를 만들 때가 생각나서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아침을 먹고 해변도로를 따라 돌았다. 도심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지나고 천수답(天水畓)처럼 계단식으로 만든 논에다 심은 마늘밭을 지났다. 잠시 갯바위에 올라 표정없이 속살을 드러낸 바다 건너 인공섬의 야자수가 조금전 스쳐 지난 무수한 마늘밭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렸을 때 보리의 껄끄러운 가시에 찔려 등을 털다 눈을 들면 붉은 장미더미가 보이곤 했었다. 보리밭 이랑에 핀 장미는 여름의 중심에 들어서는 것을 알리는 자연의 선물일 것이다.
노량에 잠시 들렸다가 남해대교를 건너 뭍으로 나왔다. 그때, 1973년 남해대교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 언론은 남해대교를 한국의 금문교(金門橋)라고 불렀다. 황색저널리즘의 혜택을 톡톡이 본 남해대교를 건넌 버스는 하동팔십리를 따라 달렸다. 섬진강을 지나. 화개장터에 들렸지만 사람들이 붐벼야할 자리에 섬진강축제를 알리는 더위먹은 현수막만 여름 가운데로 펄럭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녹색선을 따라 버스는 진안 쪽으로 접어들었다. 차창밖으로 수몰선이라는 표시목이 간간히 보이는 것을 보며, 지금 지나는 길이 머지않아 물 속으로 가라앉는 동네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쯤 지나면 이 길도, 붉은 지붕으로 단장한 저 집들도, 나무도 숲도 사연도, 추억도, 수면 아래로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다는 것,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은 슬프다. '알퐁스 도데' 의 '마지막 수업'은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어 덜 슬프지만, 문명의 이름으로 자연을 유린하다 못해 수장시키는 것은 희망이 없다. 슬픔은 희망을 버리지 못해 미련으로 차오르는 눈물샘이기 때문이다. "용담댐 이설도로 공사"라는 큼지막한 표시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잠이 들었다
얼만큼 잤을까, 사람들이 한 잔하자고 흔들어 깨워 창 밖을 보니 말의 귀를 닯은 마이산이 저 만치에서 눈에 들어왔다. 말의 귀를 닮아서 마이산이라 이름 붙혀진 암 마이봉과 숫 마이봉이 삼년 전을 떠 올리게 했다.
삼년 전 저 마이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산너머 호수처럼 보이는 저수지를 따라 지나갔었다. 간 것은 틀림없는 데 누구누구랑 갔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기억은 숨어있기는 해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게다. 망각의 숲 저 편에 얌전히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어떤 계기가 주어질 때 튀어나와 사람을 대책 없게 만드는 기억이 아름답다면 그 사람은 그래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이산에도 치열했던 순간이 틀림없이 남았는데, 겨우 삼 년 전 일인데도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단색으로 희미해서 안타까웠다.
무주를 지날 때 사람들이 노래를 청했다. 내 노래는 "그대 그리고 나" 가 십팔번이다. 임시 사회자가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최성수'의 "동행"을 입력시켰다. 타의에 의해서 부른 노래지만, 난 동행이란 노래도 좋아한다. 후렴의 노랫말이 참 마음에 들어서다.
--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 아 아--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 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속력을 냈다. 하루 밤낮의 도피가 막을 내릴 시간이 다가왔다. 버스는 판교 톨게이트를 지나 청계, 평촌, 산본을 지나 인천으로 달렸다
"/까만 밤 몇개인가 보내기 전/ 내 너를 사랑하는 까닭은/ 숙명인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너의 눈동자가 맞추던 하늘 언저리/그 곳도 이 길이었다/
"순환도로"를 만들 던 길에 어둠이 고이기 시작 했다. 잠시 뒤, 그제 밤, 가질 수 없어 버리고 싶어 떠났던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24시간의 여행은 끝났다. 왜 여행은 이어지지 않는가.
창밖으로 겹쳐지는 풍경이 영원한 줄 알고 고개를 내미느라 플랫홈에 들어섬을 알리는 기적소리를 놓쳐 허둥대는 촌노(村老)처럼, 망상을, 몽상을, 착각을, 버리는 척했던 일상을 주섬 주섬 챙기며 하루 밤낮의 여행에 온 점을 찍었다.
여행은 끝났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미 기억으로 자리잡은 여행은, 내 치열한 인생의 한 부분에 숨어 있다가 가끔 대책 없이 튀어나와 그리워 쩔쩔매는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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