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와 신문, 잡지 등 여러 방송매체가 극우와 보수를 특집으로 다뤘다. 그렇게 주목하는 것은 2003년 들어 극성스러워지고 있는 극우세력의 시위 때문이다.
올해만 봐도 극우세력은 몇몇 기독교 보수세력과 손을 잡고 대규모 기도회를 여는가 하면 인공기를 불태우는 등 많은 사고를 쳤다. 마치 과거 운동권의 시위방식(기습시위, 의도된 충돌 등)을 베끼는 듯한 이 세력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은 무엇을 추구하는 걸까?
<불가사리: 극우야 잦아들어라>가 그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책은 극우세력의 본질을 '불가사리'에서 찾는다.
| | | 글쓴이소개 | | | | 고종석 : 한국일보 논선위원
김동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성공회대 교수
송원재 : 전교재 대변인. 서울 공항고등학교 교사
오승훈 : 전 조선바보 편집장
정문순 : 웹진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정지환 : 독립기자
지승호 : 아웃사이더 인터뷰어
최내현 : 딴지일보 편집장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홍세화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한겨레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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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지층인 3억 년 전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불가사리는 오늘날의 불가사리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되풀이하자면 3억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불가사리는 전혀 진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환경부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이렇게 영구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불가사리는 어장을 황폐화시키고 수중 생태계를 파괴하는 해적 동물이며 그 포식성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8쪽)
다양한 필자들이 각기 다른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몰래 숨어 있는 그 불가사리들을 찾아서 드러낸다. 고종석은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라는 글에서 지역주의라는 불가사리를, 김동춘은 '한국의 우익, 한국의 자유주의자'라는 글에서 극우반공주의라는 불가사리를, 송원재는 '학교를 점령한 마피아: 교육의 수구파들'이라는 글에서 교육 마피아라는 불가사리를 드러낸다.
오승훈의 '극우의 상아탑에 안티조선의 깃발을 꽂다'라는 글과, 정지환의 '비정상이 정상을 조롱하는 세상을 거부한다'라는 글은 조선일보라는 불가사리를, 정문순의 '장씨 부인의 유령을 쫓는 사람들'이라는 글은 가부장제라는 불가사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최내현의 '극우 정당의 출현을 고대한다'라는 글과 한홍구의 '보수와 수구사이'라는 글은 이 땅에 보수라는 이름을 당당히 내걸 수 있는, 그 이름만이 아니라 속을 채우고 있는 세력이 없음을 비꼬고 한탄한다.
마지막으로 홍세화의 '조선일보, 극우 헤게모니의 수원지에 물이 마르기 시작하다'라는 글은 주적(主敵)을 조선일보로 정하고 "사회구성원들의 이성의 성숙과 의식의 진보를 통하여 극우 헤게모니의 수원지에 물이 마를 때까지"(288쪽) 싸우자고 얘기한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을 얘기들이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 책은 힘이 약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저항하는 보수세력을 계속 비판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점을 되새겨준다.
그리고 상대가 이미 지쳐 쓰러졌을 것이라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말고 완전히 무너뜨릴 때까지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함을, 그래야 잡초같은 생명력을 가진 극우를 뿌리째 제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드러나 있는 것을 다루기에 자칫 소리없이 진행되는, 보이지 않는 보수화를 놓치고 있다는 단점을 가진다. 사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수의 보수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소리 없이 진행되는 '사회의 보수화'다.
파시즘을 자극하고 이끈 것은 소수의 극우주의자들이지만 그것의 바탕을 이룬 것은 평범한 대중들이었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사회가 변하면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이라며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대중은 소리 없이 보수화되고 있다.
따라서 그런 불안을 막으려면 부정만이 아니라 어떤 긍정적인 것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부정의 정치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생성하는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를 절독하고 폐간시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언론이나 방송매체가 사람들의 의식과 진실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바꿀 수 있는, 매체와 수용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조정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고민도 필요하다. 새로운 대안,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