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시작이 있었던 저 먼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그 어느 날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이어질 것이며, 우리 개개인의 생이란 그 길고 긴 선 위의 아주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의 삶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미래에 존재할 사람들을 이어주는 고리와 같은 것. 원으로 도는 삶의 법칙이든 일직선상의 어느 지점이든 우리들 삶의 연속성과 찰나성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한 남자의 인생과 그 인생을 지켜보는 또 다른 한 남자 노스님. 노스님에게도 아무 고민 없었던 아이 시절과 사랑과 질투로 아프고 피가 끓었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며, 그 후에 그 고통과 분노를 넘어 스스로 안을 들여다보게 된 중년과 장년의 시간이 찾아 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노년의 텅 빈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리라. 그 시간이 있었기에 바로 옆에서 아프고 힘들게 인생을 겪어내는 그 남자를 모르는 척, 그리도 담담하게 무심한 듯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노스님이 자신의 얼굴에 뚫린 모든 구멍을 '닫을 폐, 막을 폐(閉)'자가 써 있는 종이를 붙이고 세상 떠날 때, 우리들 삶의 모든 죄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기에 참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그 무엇이 있어 평범한 우리들의 죄를 막고 닫아 줄 것인가. 어떤 담도 벽도 그것을 해줄 수 없기에 영화 속 절에는 담이 없고, 방에는 벽이 없었을까.
그러니 스스로 문을 세울 일이다. 어디로 드나들어도 상관없는 우리 마음이지만 내가 알고 그 분이 알기에 우리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닫을 일이다. 물 위에 떠 있는 절은 꿈속에서 만난 듯 아름답고, 사계절은 내가 서있는 이 계절이 어디인지를 묻는다. 인생의 계절과 자연의 계절이 함께 흘러가고 있다.
노스님 없이 한 남자의 인생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노인으로 변하며 거기에 있었더라면 그 감흥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계절을 돌아 노년의 삶에 이른 그 분의 눈이 지켜보고 있기에 함께 보는 우리들 눈도 좀 밝아졌을 것이다. 힘없고 매력 없어 보이는 노년이지만 인생의 깊이로 들어가면 이렇게 우리는 노년의 눈을 빌려 인생을 배운다. 그래서 노년은 참으로 힘이 있으며 매력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2003 / 감독 김기덕 / 출연 오영수, 김종호, 서재경, 김영민, 김기덕, 하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