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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전공부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박완서씨
홍동전공부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박완서씨 ⓒ 장선애
지난 18일 홍성군 홍동면 '풀무 전공부'(풀무 환경농업학교)에서 소설가 박완서씨의 초청 강연이 열렸다. 강사의 지명도와 어울리지 않게 이 학교 학생과 주민 30여명이 작은 강의실에 모여앉아 소박하게 진행된 이날 강연은 오후 2시가 넘어 서면서 시작, 2시간 남짓 이어졌다.

이에 앞서 풀무고등학교에서도 강연을 한 박완서씨는 간간이 체력의 한계를 호소하면서도 수강생들의 질문에 생각을 정리하며 성심껏 답변하는 모습을 보여 노작가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박완서씨는 문학 이외의 주제로 강연을 하는것이 처음 이라며, 농경문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개한 뒤 그것이 결국 공동체적 삶을 이어가는 생명줄이었음을 강조했다.

박 작가는 이날 은은한 옥색 양장을 입고 나이를 느낄 수 없는 해맑은 얼굴로 이웃 할머니가 얘기하듯 쉬운 언어로 강연을 이어가면서도 작가 특유의 직관을 보여줬다.

박완서씨는 강연뒤 이어진 질의 응답 시간에는 다양한 주제의 질문이 나오자 "그건 잘 모르겠다. 모르는게 너무 많아 미안하다"며 솔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시종 일관 농경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내 얘긴 다 한물 간 얘기”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 박완서씨. 그는 ‘한 물간 얘기’가 21세기 새로운 화두로 다가서고 있는 생명공동체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강연 내용.

"물 한동이로 하루를 살았다"

"고향은 내 숨통과 같은 것이다. 학창시절 나는 틈만 나면 고향집에 갔다. 유년에 농촌집에 있으면서 받은 영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쌀문화다.

그래서 밥은 지금도 절대 버리지 않는다. 쉰밥은 헹궈 먹고, 씻어놓은지 오래돼 냄새 나는 쌀로도 밥을 해 먹는다. 예전에는 밥알 한톨이라도 수채구멍에 버리면 ‘하늘이 보고 있는데 무섭지 않으냐’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내 고향은 개성 인근 풍덕 평야가 있는 곳이어서 쌀도 많고 물이 풍성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쌀과 물을 참 지독하게도 아꼈다. 서울로 이사하고 난 뒤에도 달동네 살아 물이 귀했다. 물 한동이로 한 가족이 하루를 살아야 했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지만 쌀에 대한 숭배 문화를 어릴 적부터 몸에 배이도록 느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 이상의 것을 쌀 문화가 가르쳐줬다고 생각한다. 쌀 농사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농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쌀 농사도 고독하게 짓더라.

나는 우리가 6·25 때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쌀 먹는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빵을 먹는 민족들과는 달리 쌀이기 때문에 부족하면 죽을 쑤고, 잡곡을 섞고, 그마저도 부족하면 죽에 우거지를 넣어 여럿이 나눠먹지 않았나.

그런데 쌀을 천대하고 땅을 버리고 있다. 농사 지을 수 있는 땅은 살려야 한다. 나도 경기도로 이사 가서 자연 친화적인 집을 짓는다고 지었는데 살면서 내가 얼마나 지독한 도시인인지 깨닫는다. 상추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곤충 같은 자연환경에도 순응하지 못하는.

그러나 곧 농촌을 살리는 것이 농촌에 살면서 자급자족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이 다 무공해 농산물 먹지 않는 한은 나도 농약친 농산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 농산물은 또 그만큼 비싼 댓가를 주고 사먹어야 하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마음에 걸려 지난해 쓰레기를 줄이는 것을 반드시 실천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고 나니 모든 상품들이 쓰레기로 보이더라. 심지어는 우리 집을 찾는 손님들이 들고오는 선물도 쓰레기로 보이는 죄를 짓게 됐다. 상품을 포장하는 수많은 비닐과 스티로폼들 말이다.

그리고 나도 책을 쓰고 있는데 책 쓰레기도 무시못하겠더라. 쓰레기를 이쁘게 버리는 실천 한 가지 제대로 하겠다는 다짐도 지키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천주교 신자인데 쓰레기에 골몰해 있다보니 쓰레기 청소부가 예수로 보이더라.

1년에 한두차례 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을 한적은 있지만 그 외의 주제강연은 처음이라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왔다. 결국 내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러 온 셈이다.

앞으로는 이런 세상이 아닐 것 같이 느낀다. 요즘 태풍 때문에 농촌에 시름이 더하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하늘이 농업의 중요성 알리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겪어보라는 경고 같은 것 말이다."

-글을 쓰게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그 전까지는 아이도 여럿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나목> 으로 등단하기까지 문학 수업은 받지 않았다. 나는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더라 읽지 않고 쓰기만 하겠느냐, 쓰지 않고 읽기만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후자를 택하겠다. 읽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

문학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이나 역할은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는 것이다. 소통 즉,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능력은 사랑이다. 좋은 문화란 사랑의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사랑이 부족하면 예술이 죽는다.

내가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6·25 당시 동족상잔의 비극이 우리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글을 써야지, 이념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고발하는 것만이 복수라고 생각하며 다짐했었다. 결국 증오심으로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결혼하면서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글쓰기는 한참 후에야 이뤄졌다. 증오만 가지고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목>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등단의 계기가 된 이 소설은 박수근이라는 화가에 대한 얘기다. 박 화가와 PX에서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죽어서 추앙받는 훌륭한 화가가 살아생전 얼마나 힘겹게 지냈는가를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돌연 소설을 쓰게 된 계기다. 결국 증오 때문에는 글을 쓰지 못하고 사랑 때문에 처녀작을 쓰게 된 것이다."

-이곳에도 귀농인이 많은데 농촌 총각 결혼문제도 그렇고 귀농인의 경우도 부인의 반대가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이 농촌을 싫어하는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글쎄, 농촌에서 살면 미워지고, 소득 보장이 안되기 때문일까? 그런데 나는 여성들이 땅하고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농촌을 끝까지 지키는 게 여자다. 농촌을 떠나고 살기를 꺼려하는 것은 남녀가 같은 문제다.

-강연중에 술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비도 오고 하니 술에 대해 얘기해 달라.

"술은 남편 때문에 배워 좋아하게 됐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안주와 술을 마련하고 집에서 먹게 했다. 남편 주량을 2홉들이 소주 반병으로 제한했는데 자꾸 더 먹으려 하기에 남은 술을 뺏어 먹다보니 술이 늘게 됐다. 그래서 인지 지금도 소주같이 독한 술을 좋아한다. 백세주나 과일주는 안먹고.

그리고 공복에 소주 한잔도 좋아한다. 공복에 소주를 한 잔 마시면 나무가 된 느낌이다. 가느다란 실핏줄까지 알콜 기운이 퍼져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 속에서 허구와 실제의 비율(?)은.

"나는 경험하지 못한 것은 못 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같이 내가 경험한 어떤 시기가 허구를 보태지 않아도 소설 같은 경우가 있다. 상상력이란 동강난 기억의 이음새를 땜질하는 작업이다. 사실 기억이라는 것도 상상력을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구와 실제를 구분하기란 어려운 얘기인지도 모른다.

<그 많던 싱아…>의 경우도 책이 나온 뒤 어릴적 묘사의 여러 부분이 사촌 동생과 서로 기억이 달라 입씨름을 한 적이 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각자의 개성과 기호와 상상력에 따라 경험의 기억이 달라지는 것이다. 팥밥을 지은 뒤 쌀과 팥을 나눌 수는 있지만 쌀에 팥물이 든 것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인간의 기억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이 없고 허황된 것이 없다. 자신이 거짓말 시키는지도 모르면서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끊임없이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나.
"소설의 밑천은 경험이다. 나는 6·25와 유신 등을 거쳐온 내 경험을 빼먹으며 소설 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을 쓰기위해 문예창작과를 나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진정한 작가라면 가장 혐오하는 것이 허위 의식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을 바로 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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