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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우리의 우방이니 혈맹이니 하지만 사실 우리는 미국의 역사를 거의 모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9월 23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쓴이의 기사 <부자의 전쟁에 가난한 사람은 총알받이?- 남북 전쟁과 300달러 징집 면제의 교훈>을 보고는, "그것이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 나오는 지어낸 얘기냐, 아니면 역사적 사실이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처음 들어본다"라고 하며 조금은 미심쩍어 하는 말도 들었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배운 적이 없으니까. 사실 글쓴이도 3백달러에 징집 면제됐다거나 징집 반대 폭동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 알게 되었다.

이에 남북 전쟁 때 징집법의 징집 면제 조항과 징집 반대 폭동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한 뒤, 우리 나라의 병역 기피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자.

부자에게는 징집을 면하노라!

남북 전쟁 때 북부와 남부는 각각 징집법(Conscription Law)을 만들었는데, 남북 모두 징집법에 면제 조항이 들어 있었다. 북부는 1863년 4월에 의회에서 통과된 징집법에 따라 대상자 가운데 제비뽑기를 하여 징집될 사람을 정하였다. 하지만 징집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징집 면제되었다.

'300 달러'를 내는 경우 또는
'대신 갈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경우


이 법은 우리가 잘 아는 링컨 대통령 때 만든 것인데, 상당히 뜻밖이지 않은가? 우리가 보통 링컨은 노예 해방을 한 '좋은' 대통령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내막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그런데 그 문제는 이 글의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므로, 더 이상 다루지 않겠다).

그래서 민주당 신문에서는 이를 꼬집어 "a Rich man's war and a poor man's fight"라고 하였는데, "부자들을 위한 전쟁이지만, 실제로 싸우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남부의 경우도 비슷하여 징집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 징집이 면제되었다.

'대신 갈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경우 또는
노예를 20명 넘게 '가지고' 있는 경우.


법이 이러하니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징집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었다.

징집 대상자의 6%만 군대에 갔다

북부에서 실제로 징집법에 따라 징집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처분을 분석해보면 참 재미있다. 솔직히 말해 이게 나라인지, 동네 병정 놀이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징집법에 따라 징집 소집 대상자는 77만6천명. 이 사람들에 대한 최종 처분은 다음과 같다.

78만(100%) 총 징집 대상자 중

16만(21%): 징집 소집에 불응(나타나지 않았음)
10만(13%): 지역별 할당 인원 초과로 집으로 되돌려 보냄
31만(40%): 육체적, 정신적 문제 또는 유일한 부양 능력자 이유로 징집 면제
9만(11%): 300달러 내고 안 감
7만(10%): 대신 갈 사람을 데리고 옴
5만(6%): 실제로 징집되어 군대에 갔음(정확하게는 4만6천명)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300달러를 내거나 대신 갈 사람을 데리고 와서 군에 안 간 사람을 모두 합친 16만이 실제로 군대에 간 사람인 5만명의 세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참 황당하기 짝이 없다. 또한 징집 소집 대상자 78만명 가운데 겨우 6%인 4만6천명만이 징집된 본인이 군대에 갔다는 것도 참 어이가 없다.

우리는 군대에 갈 수 없다!

징집 반대 폭동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부자들이 병역 면제받는 데 대한 불만이다. 3백달러를 내거나 대신 갈 사람을 데리고 와서 병역 면제를 받는데 누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생각하겠는가. 둘째, 흑인에 대한 인종 갈등인데,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을 때의 상황을 염려한 사람들의 거부 때문이다. 당시 흑인들은 아일랜드인과 같은 백인들보다 더 낮은 임금으로 일했고 많은 백인들은 일자리가 흑인에게 넘어가거나 자신의 임금이 낮아질 것을 걱정했다. 게다가 북부 노동자들은 남북 전쟁 자체에 대하여 별로 찬성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남북 전쟁이 결코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흑인 노예를 위하거나 새로 떠오르는 백만 장자(자본가)들의 이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납 부정도 엄청나게 많았다.

나흘 동안 계속된 폭동의 와중에 약 120명이 죽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음) 주로 흑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특히 흑인 18명이 목매달려 죽음을 당했고 5명은 물에 빠져 죽었으며, 흑인 고아원이 불탔다. 비단 뉴욕시의 징집 반대 폭동이 유일한 징집 반대 폭동은 아니다. 뉴아크, 트로이, 보스톤, 톨레도, 에반스빌 등에서도 일어났는데, 뉴욕의 폭동이 가장 컸다.

참고로, 남부에서도 백인의 2/3는 노예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수백만 남부 농부들은 가난했다. 당연히 남부에서도 전쟁에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북부와 남부를 종합해 보면, 남북 모두 일반 백인 서민들에게는 아무 실익이 없고 부자들의 이권이 걸린 전쟁이었는데도, 실제로 부자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이리저리 많이 빠졌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전쟁을 준비하는가?

남북 전쟁과 베트남 전쟁 때는 돈 있는 사람은 빠진 불공평한 징집이었고, 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 때는 비교적 공평한 징집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미국 역사학계의 평가이다. 또한 남북 전쟁 때의 징집법 면제 조항과 징집 폭동을 미국 역사에서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떤가? 건국 이후만 보더라도 벌써 6.25 때부터 병역 기피를 위한 유학이 꽤 있었다고 하며 (그런 사람들은 벌써 정년 퇴직했겠지만) 아직도 힘 있는 집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은 때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온다. 선거 때도 병역 기피 문제는 심심치 않게 나온다.

미국 남북 전쟁이 부자들의 이권이 걸린 전쟁이었음에도 부자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요즘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 이라크 파병 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람, 그 아들, 조카, 손자들이 병역 의무는 제대로 하는지 한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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