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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세대의 빛바랜 사진을 통해 익숙한 짙은 포연과 야자수의 나라. 10여 년 전 이데올로기의 벽이 무너져 이젠 쉽게 갈 수 있는 땅. 그러나 아직도 우리 머리 속에선 헬리콥터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 베트남. 그곳엔 우리가 살아온 옛 한국의 모습과 5000년 역사의 향기 그리고 베트남적인 동양의 정취가 있다.

거리를 걸어다닐 때마다 보이는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70년대 한국을 닮았고, 곳곳에 자리한 옛 사원에서는 오랜 역사가 느껴진다. 또 설익은 듯한 쌀밥, 독특한 향신료, 몸에 꼭 맞는 아오자이, 전통 수상인형극 등에서는 베트남만이 가진 동양 전통이 배어나오는 듯하다.

▲ 재래시장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 양유창

베트남은 남북 종단 거리가 무려 2000km나 되는 긴 나라다. 세로로 길쭉한 베트남의 양 끝에서 서로 경쟁하듯 개방화 물결에 빠져든 두 개의 대도시인 하노이와 호치민. 그런데 하노이는 호치민과 다르다. 호치민이 경제중심지로 시민들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또 여러 다국적 기업이 진출해 있는 곳이라면, 하노이는 아직 덜 자본주의화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다.

이곳 사람들은 우스개소리로 남쪽은 남자들이 인물이 좋고 북쪽은 여자들이 인물이 좋다고 말하는데, 사실 두 도시는 지리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상으로도 많이 다르고 또 2차대전 이후에는 남북 대립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도시들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서로 이질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겉으로 보이는 도시의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하노이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로 나왔다. 호치민의 활기와 비교해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호치민에서 보았던 큰 건물들은 여기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좀더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진짜 베트남’을 느낄 수 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집들, 빨간색 플래카드와 학생-군인-노동자가 함께 서 있는 포스터, 균형추처럼 생긴 바구니에 열대과일을 짊어지고 햇볕을 가리기 위한 논 모자를 쓰고 가는 아주머니들에서 상상 속에서 보아왔던 베트남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천년 전부터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의 옛 이름은 탐롱(昇龍)이다. 1010년 리 왕조의 태조가 수도로 정한 하노이를 찾았을 때 용이 송코이강(紅江)에서 승천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하노이는 한자이름 하내(河內)가 말해주듯 송코이강과 300개의 호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다. 송코이강은 중국 운남성으로 1200㎞를 흘러 통킹만으로 들어가는데 하노이는 송코이강의 거의 마지막 지점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강이 넓고 수량도 많다.

베트남의 한국 관광객은 중국, 일본 등 다음으로 7번째로 많다. 2002년에는 10만 명 정도의 한국인이 베트남을 찾았다. 올해 4, 5월에는 사스 때문에 관광객이 80% 이상 격감했지만, 여름 이후 다시 회복 추세에 있다. 최근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이 인천발 하노이 노선을 증편하면서 공격적으로 베트남 마케팅을 하고 있기에 관광객 수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 거북이가 나오면 길조로 여긴다는 환검호
ⓒ 양유창

처음 발길이 닿은 곳은 하노이의 동쪽에 위치한 환검호(還劍湖). 명나라의 침략군을 몰아냈던 레 왕조의 태조가 신으로부터 받은 보검을 거북에게 돌려주었다는 전설이 담긴 곳이다. 넓은 호수가 황홀하게 펼쳐진 이곳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호수에는 작은 섬이 하나 있고 섬에는 18세기에 지어졌다는 '응옥손' 사원이 보인다. 섬으로 연결된 다리도 인상적이다. 이곳에서는 전설 탓인지 연못에서 거북이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긴다고 한다. 2년 전에 이곳에서 몸집이 대략 2m 정도 되는 거북이가 나온 것이 세계 토픽으로 보도된 적 있다.

▲ 공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문묘 입구
ⓒ 양유창

환검호 주변은 관광지가 몰려 있어 여행객들이 근거지로 삼는 곳이다. 여행지에서 걸어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환검호에서 문묘, 호치민 광장 등을 도보로 이동하였는데, 길거리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서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재래시장에는 각종 채소들과 곡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노점상에서는 과일과 튀김, 생고기, 야채 등을 판다. 또, 벽에 거울을 걸어 놓고 영업하는 야외 이발사, 길가에 자리 깔고 앉은 복권판매상 등 낯선 풍경에 카메라 셔터 누르기 바쁘다.

야외 이발사가 거울을 걸어놓고 영업하고 있는 벽은 사실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을 기리기 위해 1070년에 세워진 문묘이다. 이곳에는 베트남 최초의 국립대학으로 1076년 설립된 국자감도 함께 있다.

▲ 거리의 이발사와 복권파는 아주머니. 당첨금은 1억동
ⓒ 양유창

사진 찍으려고 이발사에게 다가갔더니 1달러를 달란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일단 그냥 찍었다. 거리에서 사진 한 장 찍고 1달러 주는 것은 좀 심했다. 누가 처음에 주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몇몇 베트남인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새로운 관광지는 몇몇 일본 사람들이 가격을 올려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워낙 엔화 가치가 높기에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저렴한 가격을 느끼는 일본인들은 현지 물가를 올려놓는데 기여한다. 여기에 늦게 해외여행에 나선 몇몇 한국인들이 그 가격을 확인하고 물가를 다져놓는 식이다.

좀더 걸어가니 이윽고 바딘 광장이 나타났다.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베트남을 해방시킨 호치민의 기념관이 있는 이곳은 호치민 광장이라고도 한다. 호치민 기념관 뿐만 아니라 권력 최상층부인 국회도 위치해 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견줄 정도로 크지만 웅장한 멋은 좀 떨어지는 편이다.

▲ 호치민 광장.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호치민 기념관
ⓒ 양유창

호치민 기념관에는 호치민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데, 러시아에서 레닌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처럼 그 기술 그대로 호치민도 여기에 보존되어 있다. 이 '파라오'는 2년마다 러시아로 보내져 특수 처리를 받는다고 한다.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기념관이 오전에만 개방하는 것처럼 호치민 기념관 역시 주중 오전에만 문을 열고 입장하는 절차도 무척 까다롭다.

외국인 관광객 뿐만 아니라 베트남인들이 성지순례처럼 각지에서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동경인지 종교의식인지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껴졌으나 전직 대통령 생가 꾸미는 일로 논쟁을 벌이는 한국을 생각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김일성 광장은 이것보다 더 웅장할까? 갑자기 평양이 궁금해진다.

호치민의 본명은 Nguyen Tat Thanh. 한 문인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11년 요리사로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프랑스에서 식민지 해방운동을 시작,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이유 회의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 요구'를 제출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 되어 당 지원으로 프랑스 식민지 연맹을 결성하였고, 1924년 모스크바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는 동방부 상임위원이 되면서 조국의 혁명운동을 외곽에서 지원하였다. 1942~1943년 중국 국민당에 체포당한 뒤부터 호치민이란 이름을 사용하였고, 1945년 태평양전쟁 종결과 함께 8월 혁명으로 구엔 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하여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주석이 되었다. 이후 1969년 심장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독신으로 지냈다.

환검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재래시장 건물로 들어가면 2층으로 된 거대한 장터가 나온다. 이곳에는 한국의 남대문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각종 옷이나 천을 비롯해서 전자제품 등 없는 것이 없다. 상인들은 온화한 미소로 이것저것을 보여주는데, 어떤 사람은 아들 딸을 데리고 나와 함께 물건을 팔기도 한다.

▲ 다닥다닥 붙은 좁은 아파트 위로 피뢰침이 제멋대로 솟아나 있다.
ⓒ 양유창

시장을 빠져나오니 아파트 등 주택가로 이어졌다. 허름해 보이는 아파트 창문마다 빨래들이 걸려 있다. 중산층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일과가 끝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와서 7시뉴스를 본다.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중산층 이상이고, 그외는 아파트를 빌려서 살아간다. 날씨가 더운 탓에 7시에 업무 시작, 11시~2시 점심식사 및 낮잠, 5시 퇴근이다. 월급은 교수 50달러, 교사 30달러, 공무원 30-40달러 정도인데, 가정을 유지하려면 월평균 100달러는 벌어야 하며, 따라서 대부분 맞벌이나 저녁 부업을 한다. 보수가 적은 탓인지 직업에 대한 애착은 별로 없는 편이다. 실업률은 6% 정도로 직장이 없는 청년들은 당구장, 공원 등을 전전한다.

▲ 재래시장의 청년들
ⓒ 양유창

한국으로 오는 베트남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중산층 이상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비행기 표나 여권을 마련할 돈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갈 수도 없다.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항공료는 대략 35만 원 정도.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80만 원에서 120만 원 정도를 줘야 비행기표를 살 수 있다. 베트남 농민들은 한달에 보통 3만 원 정도를 번다. 물가를 감안할 때 여행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반면 한국 농촌 총각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자들은 이곳에서도 몇백만 원에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시골 출신들이다. 그들은 부모 형제를 가난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이국의 낯선 땅으로 시집 와서 낯선 남자에게 몸을 바친다. 이런 전근대적인 일은 결혼알선업자에 의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 수상인형극이 끝나고 인형 조종 연기자들이 무대에서 인사하고 있다.
ⓒ 양유창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환검호 주변에 있는 탐롱 수상인형극장(Thang Long Water Puppet Theatre)의 공연 티켓을 샀다. 'Mua Roj Nuoc Thang Long'이라는 제목의 공연이었는데, 세계 여러나라에서 공연될 만큼 인기가 있다고 한다.

1시간 동안 가족단위로 즐길 만한 수상인형극은 무척 재미있었다. 공연 시작 전에 베트남 전통 음악을 들려주는데 현악기가 너무 구슬퍼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했다. 용이 춤을 추고, 개구리가 뛰고, 전통 의상을 입은 베트남인들이 행진하고, 사자가 나온다. 환검호에 얽힌 전설을 수상인형극으로 만든 것이다.

관객은 대부분 서양인이었는데, 하노이에 온 관광객이 모두 모인 것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많았다. 아이를 안고 온 베트남 사람들도 꽤 눈에 띄었는데, 이들은 공연 시작 전부터 시끄럽게 떠들더니 20분쯤 되니까 전부 나가버리고 없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공연인지 모를 정도다.

공연이 끝난 뒤 오랜만에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한국 교민은 호치민에 1만여 명, 하노이에 1천여 명 정도 사는데, 그중 자영업자의 비율은 30% 정도다. 대부분 식당이나 가라오케, 마사지 같은 일에 종사하는데, 한식당은 고급 식당으로 인식되어 현지인에게 인기가 있을 뿐 아니라 교민이라는 고정 수요도 있기 때문이고, 가라오케나 마사지는 아시아의 인기 관광상품으로 인지도를 굳혀서 꽤 수익이 남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는 퇴폐 마사지 업소도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아직까지 외국인은 베트남에서 49% 이상의 토지나 건물, 기업을 소유할 수 없기에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 한국인들은 믿을 만한 베트남 파트너를 구하거나 혹은 베트남인과 결혼한 한국인을 통해 투자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 한창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호치민과 하노이의 개발 예정지역 토지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꾸준히 사들인다고 한다. 한국의 강남 신화를 아는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땅으로 한 몫 잡아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 도자기 마을의 도자기들. 한 여자가 수작업으로 일일히 도자기에 색을 칠하고 있다.
ⓒ 양유창

다음날, 나는 아침부터 서둘렀다. ‘바짱’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도자기 마을인 이곳에는 마을 전체에 도자기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한 상점에 들렀다. 5층으로 되어 있는 그곳에는 층마다 각종 용도의 자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5층에서는 직접 자기를 굽고 있었다.

저렴한 가격의 품질 좋은 도자기로 기념품을 고른 뒤 난 다시 하노이로 향했다. 버스 바깥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풍경이었다. 호수가의 작은 집, 세로가 넓은 뾰족 지붕, 기와로 된 아파트, 여기저기에 논, 야자수를 지나면 낡은 집, 전봇대, 거의 쓰러질 듯 부서진 집터, 논 사이에 모셔진 다양한 형태의 묘 등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하노이의 숙소에 도착해서 가방을 챙겼다. 이제 베트남 여행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동안 정들었던 베트남이 못내 아쉬워졌다. 나는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던가? 그동안의 일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무엇보다 간절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물건을 사달라고 외치던 관광지의 소녀들의 눈빛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환검호에서 시작해서 식당까지 나를 쫓아왔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까지 기다렸다가 계속 쫓아다녔다. 무엇이 소녀들을 거리로 내몰았을까? 베트남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데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풍경처럼 그렇게 거리에 남아 있다.

▲ 하노이의 한적한 마을 풍경
ⓒ 양유창

생생한 기억을 이제 아련한 추억들로 간직한 채 나는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은 2000년에 지어진 하노이의 새로운 공항이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동안의 여행의 피로로 지친 탓인지 이내 곯아 떨어졌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으려 줄을 섰다.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베트남인들 너댓 명이 외국인 전용 수속 줄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왠지 반가운 마음에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한국에 처음 도착한 탓인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저 공항 문을 통과하면 곧 외국인 노동자 신세가 될 것처럼 보이는 차림새에 불행히도 인천공항 직원이 먼저 반응했다. 인천공항 수속 담당자의 첫 마디는 이랬다. “아이구, 이 사람들 또 왔네.” 그 한 마디에 내 얼굴이 먼저 화끈거렸다. 지금 내 안의 베트남이 묻는다. 그 사람들, 잘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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