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마하깜
ⓒ 김비아

기회 닿는 대로 이곳 저곳을 많이 돌아다녔지만 칼리만탄(보르네오의 인도네시아 영토) 여행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탄중푸팅 다음의 목적지 마하깜(Mahakam) 여행은 특히 힘들었다.

마하깜, 보르네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River life'를 빼놓고 칼리만탄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강은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터전이자 곧 길이다. 도로 대신에 강을 통해서 칼리만탄 내륙 구석구석까지 연결된다.

탄중푸팅에서 다시 반자르마신으로 돌아와 마하깜 여행의 출발지 사마린다(Samarinda)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내가 묵었던 보르네오 홈스테이 주변 지리는 이미 눈에 훤했고, 동네 사람들도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가난하지만 예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그들과 아쉽게 작별을 고했다.

사마린다는 칼리만탄 동북부의 항구 도시다. 사마린다보다 조금 남쪽에 위치한 석유 도시 발릭빠빤(Balikpapan)까지 비행기로 이동하기로 했다. 칼리만탄은 해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도로가 갖추어지지 않았을 만큼 도로 사정이 엉망이지만, 항공 교통과 수상 교통은 무척 발달해 있다. 이만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네들은 자기 나라가 자동차는 못 만들지만 비행기는 만들 수 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하곤 했다.

비행기 안, 옆 자리에 앉은 청년들이 서툰 영어로 말을 건다. 자바 섬의 자카르타와 수라바야에서 온 조니와 먼디는 부드러운 눈매에 둥근 얼굴이 왠지 눈에 익어 보였는데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라 했다. 맑고 선한 눈빛에 믿음이 가서 나도 쉽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역시 나처럼 사마린다까지 가는 길이라 함께 택시를 타고 발릭빠빤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사마린다로 향했다. 조니와 먼디는 출장 중이었다. 여기 여행 온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무척 반가워했다. 자기 상관에게 말해서 사마린다 구경까지 시켜주겠다고 나섰다. 친절하고 순수한 청년들이었다.

▲ 식당에서
ⓒ 김비아
덕택에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사마린다의 해안 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렸고, 상관의 가족과 직원들이 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도 초대되었다. 사마린다의 게 요리는 맛이 일품이었다. 모두 화교였는데, 상관은 이 지역의 호텔을 몇 개 소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화교가 인도네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내가 마하깜을 간다고 하니 다들 걱정하는 눈치였다. 꼭 가야겠냐고. 그래도 가겠다니까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마하깜 강을 따라 자리잡은 다약족 마을에선 영어가 통하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나는 가이드를 구하기로 하고, 여행객들이 많이 몰리는 호텔 거리로 갔다. 조니의 상관은 아이다 호텔에서 일하는 루디씨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들은 말은 사마린다 전체에 여행자는 나 혼자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해드헌팅의 대참사 이후 여행자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고. 정부 자격증을 소지한 가이드는 지금 사마린다에 없다고 했고, 유일하게 발견한 사람이 수리야디씨였다. 중년의 약간 딱딱한 인상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론리 플래닛에서 그의 이름을 본 적이 있어서 믿기로 했다. 그러나 조니는 수리야디는 너무나 흔한 이름이라면서 어떻게 같은 사람인 줄 아냐고 염려했다.

ⓒ 김비아
루디씨가 해결책을 생각해 내었다. 수리야디씨로부터 무사히 다녀오겠다는 각서를 받은 것이다. 내가 만일 마하깜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그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나는 무얼 그리 걱정할까 싶었는데 마하깜에 가서야 그의 염려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정말 거대한 강이었다. 내가 실종된다 해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마린다에서 마하깜 강을 따라 내륙의 롱바군(Long Bagun)까지는 520킬로미터가 넘는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꼬따반군(Kota bangun)에서 강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퍼블릭 버스를 타고 세 시간 언덕 길을 달려 꼬따반군에 도착했다. 선착장에는 여러 명이 앉을 만한 길쭉하게 생긴 모터보트를 모는 노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배가 아니라 보트에서 가깝게 바라보는 강 풍경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나무와 덤불, 간간이 보이는 집들이 옆을 스쳐가며 강은 좁아지다 넓어지다를 계속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리는 동서남북 끝이 보이지 않는 지점 위에 있었다. 바다와는 또다른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황토색 강물이 사라지고 하늘 전체를 담은 강이 연하늘빛으로 거울처럼 매끄럽게 빛났다. 하늘과 강의 경계는 사라지고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드넓고 아득한 공간만이 자리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 마하깜
ⓒ 김비아

▲ 마하깜
ⓒ 김비아

눈부신 그 광경을 뒤로 하고 배는 계속 나아갔다. 멀리서 점 하나가 눈에 띄더니 점점 커지면서 쏜살같이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간다. 보트였다. 광활한 강의 풍경에 넋을 잃고 있던 나는 그때서야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음을 상기했다. 이 강에 적응해서 오랜 세월 함께 흘러온 사람들의 삶 역시 내겐 낯설고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무아라문따이(Muara Muntai)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하깜 강은 다약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무아라문따이는 다약족이 아니라 말레이계의 꾸따이족이 사는 마을이란다. 배를 세우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입구에서부터 무척 번화해 보였는데, 곧이어 과일과 각종 생필품, 옷가지들을 파는 아기자기한 시장 거리가 나왔다. 무아라문따이의 도로는 모두 나무로 건설되었는데, 반듯하고 예쁜 모습이었다. 그 위를 뚜벅뚜벅 걸으며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물이 찰 것을 대비해서 집은 전부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높게 지어졌다. 집 사이사이마다 바나나와 코코넛 나무가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강렬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 다시 마하깜을 따라 길을 나섰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수록 강물은 점점 빛을 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 무아라문따이 가는 길
ⓒ 김비아

▲ 무아라문따이 입구
ⓒ 김비아

▲ 무아라문따이 거리
ⓒ 김비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