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박노자만이 아니라 다른 학자들도 이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나미의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 2001)은 <독립신문>을 분석함으로써 한국 자유주의가 가진 친제국주의, 반민중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박노자에 대한 관심은 그 역시 서구인이라는 점, 그렇기에 밖을 칭송하는 우리 사회의 어긋난 특성을 반영하는 듯 해서 씁쓸함을 남기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노자의 연구가 가진 중요성을 깎아 내리면 안 된다. 오히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인 만큼 더 진지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역사가 E. H. 카(Carr)에 따르면, 역사를 보기 전에 먼저 역사가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나를 배반한 역사>라는 책을 다루기 전에 먼저 박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 | | 지은이 소개 | | | | 박노자(朴露子):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박노자가 태어난 곳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이러한 그가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하고, 지금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사를 보는 거시적인 혜안 속에 치열하게 인문학적 성찰의 삶을 살아온 그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토종' 한국인보다 진한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이번 <나를 배반한 역사>는 지금의 우리를 만든 근대 한국 100년사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자 도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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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그는 소련 사회주의를 경험하고 그것의 붕괴를 목격했기 때문에 집단주의에 대한 또 다른 거울 이미지를 한국사회에서 찾는 듯하다. 그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는 구절을 보자.
"소련 공산당의 독재정권에 대한 혐오는 독재정권이 일종의 우상으로 만들었던 과거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게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의 인격이나 저서 자체가 아무리 좋더라도, 그들의 대형 초상화 밑에서 썩어빠진 관료들이 뇌물을 챙기는 사회에서 마르크스나 레닌을 좋아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122쪽). 뒤에 살피겠지만 이 관점은 개인주의에 대한 칭송으로 이어진다.
한국 근대사를 보는 박노자의 관점은 아주 날카롭다.
"국가의 입장이 아닌 19세기 민초들의 일상에서 볼 경우 외세의 침범보다도 조선 사회의 내재적 위기가 훨씬 더 큰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14쪽). 외세가 가한 수난과 그것에 대한 극복만을 강조했던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쓰는 말이다.
박노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물론 식민화 세력이라는 '바깥'과 이들 식민화 세력에 편승했던 토착적 착취자라는 '위'로부터 가해진 물리적 고통이 가혹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외세의 침략 속에 세계체제에 편입된 나라의 상당수 사람들이 그 체제의 反인륜적인 논리를 자기화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난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외적들에게 삼천리 강토를 빼앗기고 부일배(附日輩)나 부미배(附美輩)들로부터 착취와 통제를 당하는 것도 고난이겠지만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압도당해 그들의 논리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것이 가장 큰 치욕이라는 생각이다"(17쪽).
<나를 배반한 역사>는 바로 그 논리를 드러내려는 노력이다. 바로 그 논리들이 '국민', '인종주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유사(類似) 개인주의', '부정부패', '상무(尙武)정신', '여성에 대한 억압', '신민(臣民)이라는 굴레', '지역주의' 등이다.
그런데 개인주의에 대한 집착이 책의 '균형'을 흔들리게 한다. 자신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개념에 대한 박노자의 설명은 아주 추상적이다.
"여러 계급과 계층들의 이해관계가 자유롭게 표현되며 자율적으로 조절될 수 있는 시민사회"(55쪽) 정도이다. 개인주의에 대한 설명 역시 사전적인 정의를 따라
"개인이 그 자신의 최종 목표이며, 최고 가치이며 사회란 인간의 그와 같은 궁극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80쪽)고 얘기한다.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다르다는 건 상식으로 알 수 있다.
"근대 한국 지성이 개인주의에 대해 취하는 애매하고 불철저한 관심과 두려움이라는 양면적인 태도"(82쪽)를 극복하려면 상식을 넘어서 개인과 개인주의를 구체적인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
더구나 이런 개인주의에 대한 집착은 논의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한편으로 범아시아주의를 부르짖거나 무조건 서구를 추종한 개화파들이 다른 한편에선 개인주의를 고집한 사람들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한편에선 높이 살 만한 점도 몇 가지 있을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경험(도일·도미 유학, 개신교 개종 등)을 했던 그들이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개인주의적 윤리관에 철저했다는 점이다.…매판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들의 과도 크지만, 일정한 공도 일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124쪽)는 말까지 한다. 개인주의는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선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박노자는 여기에 대해서도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고 개인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며, 자율이라는 구호 아래 실제로는 경쟁논리를 강요하는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에서 답을 했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개인주의와 관련해서 그 입장은 애매하다. 이런 애매함은 박노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러시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려진 것이 아닐까?
박노자는 '역사'라는 큰 흐름 앞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나'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자리를 만들기란 쉽지 않다. 한국사회가 매우 집단적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개인' 또는 '개인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필요하다면 그것을 분명하게 얘기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야 그것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책에는
"그들에게 개인주의의 참뜻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은 진보 진영의 급선무다"(118쪽)라는 선언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