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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경내와 소백산 능선이 고즈넉하다
ⓒ 최윤미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하나 둘 가을을 앓기 시작했다. 매미 한 마리가 서럽게 울고 간 다음 갑자기 들이닥친 탓인지 마음의 준비를 할 틈이 없었던 사람들은 꽤 어리둥절했던 모양이다.

곳곳에서 ‘가을이어서 그런가…’하며 심란한 심사의 핑계를 대곤 했지만,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아픔과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함이 별다를 것 없는 가을을 더 스산하게 느끼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 시간을 견뎌낸 것들이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지 상관없이 늘 그대로인 풍경들 속에는 온기가 있으리라. 그렇게 영주 부석사를 찾았다. 지난해 우연히 들렀던 기억을 더듬어 한자락 위로를 담아오길 바라며.

▲ 은행잎이 물들기 시작했다
ⓒ 최윤미
영주로 가는 길에도 매미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논 중앙에 그대로 누워버린 벼들과, 볕이 부족해 거뭇거뭇 마르기 시작한 이삭과 고춧대들, 사과며 배들이 바닥에 나뒹굴며 썩어가고 있었다. 내륙이었지만 세찬 비바람과 불어난 개울물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영주에 접어들어 풍기를 거쳐 부석사로 가는 길은 은행나무와 코스모스가 늘어선 아담한 아스팔트 양편으로 사과나무가 지천이었다. 피해가 빗겨갔던지 키 작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들이 수줍게 붉었다. 연하게 흘러드는 사과 향기가 가을을 몰고 오는 듯 느껴졌다.

부석면 끝자락의 차가 갈 수 있는 막다른 길에서부터 부석사로 가는 흙길은 시작되었다. 일주문을 지나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을 정도의 경사진 길을 따라 키 큰 은행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하늘을 가린 은행나무 터널을 걷는 10분, 20분 동안 한발 한발 디딜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앓는 사람들이 이 길을 오른다면 지친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아픈 마음도 나을 것만 같았다.

▲ 천왕문과 범종루
ⓒ 최윤미
부석사 천왕문을 지나니 위엄을 품은 범종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곧게 난 흙길이 시원하게 뻗어있어 경건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커다란 통나무들이 1층과 2층을 관통하며 지붕을 받치고 있었는데, 그 나무기둥의 거친 결과 무늬에 고스란히 묻어있는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비와 바람과 햇살을 기억하고 있을 나무들. 화려한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건축물들이 퍽 무던해 보였다.

범종각 아래를 지나 돌계단 앞에 다다르니 안양루와 그 뒤의 무량수전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범종각처럼 웅장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모습, 말없이 오랜 세월을 견뎌낸 것들이 그 존재만으로 위안을 주고 있었다.

▲ 무량수전과 그 앞에 선 가족
ⓒ 최윤미
돌계단을 올라 무량수전과 석등 앞에 합장한 다음 뒤돌아 섰을 때 ‘극락’이라는 ‘안양’의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안양루 처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부석사 경내의 풍경과 멀리 굽이 굽이 겹쳐진 소백산 능선의 풍경이 가슴 벅찬 충만함으로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금까지 올려다 보기만했던 것과는 다르게 멀리 아래를 내려다 보는 풍경이, 소백산 자락이 두 팔을 그러모은 것처럼 펼쳐져 있어 높은 곳에 있는데도 아늑한 마음이 들었다.

말도 잊고, 상념도 잊고, 살갑지는 않지만 진심을 담은 위로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 부석과 보살님
ⓒ 최윤미
한참 후에야 무량수전이 눈에 들어왔다.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다는 아미타여래,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라고 한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수없이 마주쳤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인,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으며 역사적으로는 가치가 아주 높은 건축물. 그 가치를 알아볼 혜안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배흘림 기둥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기둥 위쪽이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라는데, 그 모든 것들과 상관없이도 무량수전은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다. 세월에 다듬어진 석축과, 오래된 격자 문들과,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배흘림 기둥과, 그 안에 고여 있는 평안의 기운들 모두가 말이다.

무량수전의 왼편으로는 부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뜬돌’인 커다라 반석이 세월의 흔적을 품고서 실제로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위에는 작은 돌멩이 탑들이 간절한 소망처럼 곳곳에 놓여 있었다. 저기 돌멩이 하나 보태 놓으면 내 소망도 이루어질까.

▲ 엄마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 최윤미

▲ 걸어나오다 만난 사과나무
ⓒ 최윤미
부석사에서 내려가는 길은 오를 때와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건축물의 다른 면을 보게 되고, 같은 풍경을 다른 방향에서 보게 되는 것일 뿐인데도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확히 표현하면 마음일 테지만 말이다.

부석사에서 걸어나왔던 그 길의 은행잎들은 지금쯤 노랗게 물들었을까. 요즘들어 유난히 푸르고 깊어진 가을 하늘을 보며 그 은행나무들을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부석사의 풍경들이 다시 위안이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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