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분홍'이 시청 앞 광장을 수놓으며 호주제 없는 양성 평등의 유쾌한 세상을 선언했다. 2003년 10월 3일 개천절. 반만년의 역사 속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비껴있던 대한민국 여성들을 주체로 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려 한다. 다양한 50여개의 여성·시민·문화 단체들이 주최한 '새하늘 새땅을 여는 대한민국 여성축제'가 10월 3일 시청 앞 광장에서 '천지개벽'을 선포했다.
이들이 말하는 천지개벽은 남녀 모두 조화롭게 공존하는 양성 평등한 세상으로, 호주제가 파생한 온갖 억압과 차별을 날려버리고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모이자! 놀자! 바꾸자!"라는 취지 아래 10대부터 90대까지 모인 2백여명의 다양한 여성들은 '평등'과 '평화'를 원하는 당당한 몸짓과 목소리로 여성이 주인된 세상을 꿈꾸며 살맛 나는 문화 축제를 벌였다.
행사는 크게 天(천지개벽을 여는 하늘 평화 마당), 人(양성 평등 마당), 地(새 땅에 울리는 환희의 생명)로 나눠졌고 남녀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놀이로 대미를 장식했다. 특히, 무대라는 고정화된 경계나 구역 없이 앞뒤, 좌우 가릴 것 없이 그저 사람이 모이면 판이 벌어지는 통에 관객들은 부지런히 몸과 시선을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관람을 해야 했다.
부대 행사로는 알뜰 장터와 금연 침, 헤나 문신 및 페이스 페인팅, 여성 인물을 그린 화폐 전시 등의 부스와 코스프레가 마련돼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여성 인물을 화폐에'라는 부스에선 그 후보로 유관순, 김만덕, 선덕여왕, 명성왕후, 이태영 등의 인물을 선보이고 '여성 인물 화폐에 넣기' 서명 운동을 펼쳐 관객들에게 많은 호응과 관심을 끌었다.
연두색 가발을 쓴 여성학자 오한숙희씨의 "남성들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자인 우리와 역사의 주역으로 같이 가자!"라는 우렁찬 인사로 본 막이 올랐다. 이어 첫무대는 한영애씨의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에 맞춰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화투 카드 섹션이 선보였다.
"호주제 폐지 올해 꿈은 이루어진다!", "호주제 폐지 걸림 국회의원 나가 있어!" 등의 화투 카드 섹션을 기획한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들' 소속 회원들은 화투에 여성을 그려 넣거나, 암수 한 쌍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양성이 평등한 세상에 대한 바램을 표현했다.
들뜬 분위기는 '낙태당한 여태아를 위한 살풀이 퍼포먼스 '에밀레'의 공연으로 사뭇 진지하게 반전되었고 그 후 '한국 성적 소수자 문화 인권 센터'가 호주제 풍자극을 펼쳐 또 다시 축제 분위기로 이어졌다.
새 땅과 하늘을 열기 위해 관객들은 힘차게 발을 구르며 분홍 고무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하늘을 찔러댔다. 이에 지켜보던 하늘도 덩달아 신이 났는지 행사 초반 구름으로 가렸던 새파란 얼굴을 들어내기 시작하며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오한숙희씨가 지핀 축제의 열기는 다음 사회자 최광기씨에게로 이어졌다. 심장을 울리게 하는 여성 타악 그룹 '리타'의 가락에 맞춰 온통 분홍색으로 단장한 포크레인이 여성 축제 추진위원 고은광순씨를 태우고 유유히 등장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 모임 운영위원이기도 한 고은광순씨는 유관순 열사로 코스프레를 펼치며 호주제 모순을 꼬집은 '새 개천절 향가'를 힘차게 낭독했다. 이어 5세의 어린이부터 80세까지의 여성들이 올라 고은광순씨가 지은 2003 대한민국 여성 헌장 선포식을 가져 통쾌함을 느낀 관객들에게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고은광순씨는 "여전히 남성 중심인 한국 사회의 개천절 문화에 맞서 세계 평화와 역사의 길을 열기 위해 여성들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이 행사가 단순히 놀고 끝나는 것이 아닌 즐겁게 놀며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행사 후에도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국회의원 낙선 운동을 합법적으로 벌일 것"이라며 "대한민국 남성들과 함께 행복하고 존중하며 사랑하자"고 당부했다.
또, 양성 평등 발언대에선 각계 각층의 여성 인사들이 무대에 올라 열변을 토하며 호주제 폐지를 역설했다. 특히, 부산 국제 영화제 대신 여성 축제를 방문한 영화 평론가 유채지나씨는 "여성들이 남자에게 해 준 만큼 자기 자신을 존중해 주자"며 "여성 각자가 주인이 되는 삶"을 열렬히 호소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이에 관객들은 월드컵 응원 구호 구령에 맞춰 "호주제를 폐지하라!", "양성 평등 이룩하자!"를 크게 외치며 무대에 오른 인사들의 발언에 호응했다. 이날 관객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행사 주최측에서 나눠준 분홍색의 고무 장갑을 끼고 "PEACE BY WOMEN"이 새겨진 분홍색 배지를 달았다.
비록 대부분의 관객들이 여성이었지만 가족 혹은 친구들과 같이 온 남성들도 더러 있었다. '결혼과 가족' 이라는 교양 수업의 일환으로 참가했다는 정진호(20)군은 "남자라서 솔직히 민망하다, 하지만 여성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같이 기분이 좋고 재미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행사를 통해 그간 몰랐던 여성들이 지닌 절박한 문제에 대해 비로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될 것 같다"며 "아직은 행사 취지에 반대하는 분들이 더 많은 게 한국 현실이지만 여성분들이 끝까지 용기 잃지 말고 노력해 주셨으면 한다"고 전했다.
호주제 폐지에 관한 시위가 아닌, 축제라기에 한번 들려 봤다는 하성용(58)씨는 "아직도 한국은 여전히 사회는 물론 가정에서도 여성들에게 불평등한 게 사실이다"며 '새 시대에 맞는 남성들의 인식 전환'을 요구했다. 이어 하씨는 "남자들에게 의지하려는 여성들의 태도 또한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한다"며 "미래는 능력 있는 여성 상위의 시대가 될 것"이라 장담하기도 했다.
호주제에 대해 그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법"이라며 "이미 알다시피 여러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억압하는 제도라면 폐지돼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또 하씨는 "이런 행사가 서울에서 대규모로 열리는 것도 좋지만 지방을 돌며 작은 규모로 자주 열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뒷짐지고 멀찍이 앉아 있던 남성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엔 행사의 분위기에 점점 동화돼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 여성들은 음악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주저없이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등 적극적인 자제를 보였다.
그 중 유독 즐거워하며 한 순간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연히 뉴스를 통해 행사를 전해 듣고 김밥까지 싸왔다는 김기순(67)씨가 그 주인공이다.
김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간 억누르고 살아왔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다 풀리는 것 같다"며 "나 자신도 내 계발보다는 남을 위해 살아 왔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과연 호주제가 있는 나라가 전 세계에 또 어디에 있는가?"라며 "국가나 남성들이 이젠 여성들의 권리와 능력을 인정해줘야 우리도 선진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2남 2녀를 두고 있다는 김씨는 "내 아들에게도 며느리나 딸들과 똑같이 집안 일을 시키고 있다"며 "여성들도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인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당당히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범대에 재학 중인 김경진(26)양은 "적어도 남성들은 이런 행사를 굳이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며 "세상의 반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간과되었던 소외된 여성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양은 "좋아했던 분홍색을 혼자 속으론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이번 행사를 통해 순수한 여성성이 발현된 색임을 깨달았다"며 "오늘 행사를 통해 느낀 여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차후 여학생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행복한 한 가족을 만나봤다. 잠이 든 초등학교 일학년 딸을 품에 안고 관람하고 있는 아버지 이진우(38)씨는 "언젠가 권해효씨가 말했던 "여성 문제는 곧 인권 문제다"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단언했다. 이어 그는 "솔직히 나도 한국에서 벌써 38년을 살았는데 내 보수적 성질이 어디 가겠는가?"라며 "과연 딸에게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씨는 "아이들이 자기 의사와는 무관하게 구분된 사회적 울타리에 의해 살아가게 되는 건 옳지 않다"며 "사회가 발전해 딸이 살 대한민국의 미래는 딸이 뭐든지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어 어머니 최경희(38)씨는 어느 날 딸이 유치원에서 병원 놀이를 했는데 간호사를 했다 길래 "왜 의사를 하지 않았니?"라고 물었다가 딸이 "여자는 간호사를 해야 된데요"라는 대답을 해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이에 최씨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사회가 여자와 남자를 구분해 가르치는 것 같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관객들과 같이 호흡하며 무르익어 가는 여성 축제는 페미니스트 가수이자 만인의 '언니'인 안혜경씨의 출연으로 절정에 도달했다. '사랑하는 언니에게', '고추밭' 등을 열창한 안혜경씨는 오색천을 흔들며 호응하는 관객들과 하나되어 무대를 휘어잡았다.
'행복한 이름'이 되어야 할 대한민국 여성들. 행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대한민국 여성 만세!"를 목청컷 외치며 평화로운 새 세상을 기원했다. 그들의 하나된 몸짓과 목소리는 신명나는 대동놀이로 이어져 시청 앞 광장을 분홍 물결로 가득 메웠다. 따로 또 같이 손에 손을 맞잡고 모인 남녀 모두는 서로의 '공존' 가능성을 확인하며 내년 새로운 개천절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