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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향산 입구에 위치한 국제친선전람관. 이곳은 사망한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진 선물을 전시한 곳이고 인근 아래쪽에는 김정일 위원장 전시관이 별도로 있다.
ⓒ 오마이뉴스 김병기

평양시내를 빠져나와 서북쪽으로 향하면 한적한 고속도로가 하나 길을 연다. 이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도중에 오른쪽으로 강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의 위업을 이룩한 살수, 이른바 청천강이 바로 그것이다.

맑은 강물에 시선을 빼앗긴채 두 시간 가량을 냅다 달려 고속도로가 끝날 무렵 우회전해서 대교 하나를 건너면 '향산 입구'라고 적힌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북에선 묘향산을 '향산'이라고 부른다.

향산 어귀엔 산이름을 따 20층 정도로 보이는 향산호텔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보통의 경우 건물이 대개 가로 직사각형인데 이 건물은 건물 양쪽이 상단부로 갈수록 줄어들어 마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북에서 만난 어떤 이는 호텔 건물이 뒤편의 산 자태를 죽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일리가 있는 얘기로 들렸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묘향산 얘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이 아니다. 북에서 남쪽 사람들을 향산으로 안내할 경우 산이나 호텔 구경보다는 인근에 있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오히려 주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향산호텔에서 나와 호텔을 끼고 오른쪽으로 차로는 5분,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북측이 자랑하는 전시관 하나가 있다. 바로 '국제친선전람관'이 그것이다. 이곳은 사망한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해외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한 곳이다. 전시물은 이른바 김일성관, 김정일관(정식명칭은 아님) 두 곳을 합쳐 지난해말까지 집계한 바에 따르면 무려 21만7441점이나 된다.

위쪽에 있는 김일성관에는 없지만 아래쪽 김정일관 1층에는 남측인사들이 보낸 선물을 모아 전시한 남한관이 있다. 그곳에는 역대 대통령(김영삼 대통령만 빼고)이 보낸 선물부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기업인, 언론인, 사회단체, 그리고 무명의 일반시민들이 보낸 선물이 보낸 사람(기관)의 명패와 함께 잘 전시돼 있다.

남한관의 전시물 가운데서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동아일보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바친 선물이었다. 사망한 김일성 주석이 1936년에 조직한 ‘조국광복회’가 압록강을 넘어와 함경남도 보천보의 면사무소 등을 파괴한 항일투쟁을 흔히 '보천보 전투'라고 보른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를 '호외'로 보도했다.

▲ 지난 98년 동아일보 취재진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순금으로 제작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로 바친 1937년 6월5일자 동아일보 '보천보 전투' 호외. 기사 왼쪽에 '김일성(金一成)'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이 보도는 한 때 우리사회에서 논란이었던 '가짜 김일성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8년 <동아일보> 방북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사측은 이 호외를 순금 원판으로 제작해서 북측에 선물했다. 경쟁지인 <중앙일보>가 대북사업에서 기선을 잡자 다급해진 나머지 이런 선물까지 해가면서 북에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 당시의 <동아일보>였다.

냉정하게 한번 따져보자. 세상이 변해서 남북간에 교류가 있다고는 하나 '적국의 수괴'를 칭송하는 내용의 선물을 보냈다면 이는 현행 국가보안법 상 '고무·찬양죄'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운동권 학생들이 북측 지도자나 체제를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가 고무·찬양죄로 처벌받은 경우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런데 북의 지도자 고무·찬양이라면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을까.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지금 동아일보 관계자들은 지금이라도 소급해서 국보법의 처벌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두고 당시 언론에서 <동아일보 취재진, '친북 혐의' 논란> 이라고 보도했다면 <동아일보>는 과연 이런 보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지금 <동아일보>는 마치 이와 비슷한 행태의 내용을 1면에서 머릿기사로 다루고 그것도 부족해 해설면 2개 면을 할애해서 대서특필해대고 있다.

<동아일보>는 3일자에서 'KBS 정 사장 간첩연루 논란'을 1면 머릿기사(초판 기준)로 다루고 3면 전면과 4면에서 박스기사로 관련기사를 다뤘다. 골자는 2일 문광위 국감장에서 한나라당 이원창 의원이 "95년 3월 '남한조선노동당사건' 당시 주모자인 황모씨(당시 복역중)가 밖으로 내보내려던 지령문에 정사장의 이름이 거명됐다"고 발언한 것을 보도하면서 정사장에게 '간첩혐의'라는 '빨간 딱지'를 붙인 것이다.

이 날 <동아일보>에 보도된 이 의원과 정 사장간의 국감장에서의 일문일답, 2일 저녁 문제의 황씨가 KBS에 전화를 걸어 해명한 내용, 그리고 3일 저녁 KBS '9시 뉴스'에서 보도한 내용 등을 종합해볼 때 <동아일보>가 정 사장에게 '간첩혐의'라는 딱지를 붙이기에는 근거도 부족하고 또 다분히 성급했다. 이는 정사장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라고 본다.

1면에 이어 3면에 실린 관련 박스기사에서는 야당의원들의 입을 빌어 정사장 부임 이후 시작된 일련의 개혁성향의 프로그램들을 '정연주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정권 편들기, 비판언론 때리기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또 KBS 게시판에 올라온 독자글 가운데 비판적인 내용과 보수우익 관계자들의 입을 빌어 'KBS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을 앞장서서 펌프질하고 있다.

이날(2일)은 정 사장건보다는 국정원 조사 이후 검찰 소환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통해 검찰조사와 언론보도를 반박한 송두율 교수건이 훨씬 더 비중있는 뉴스였다고 할 수 있다. 실지로 <동아>를 제외한 대다수 언론들이 송 교수 기자회견을 톱뉴스로 다뤘다. <동아일보>측이 그게 타 매체와의 시각차이며, 또 차별화라고 한다면 그건 필자로선 할말이 없다.

▲ 동아일보 10월 3일자 초판.
ⓒ 동아일보 PDF
다 아는 얘기지만 KBS 정사장은 <동아일보> 기자출신이다. 물론 정 사장은 '동아투위' 출신으로 회사에서 해직당했으니 회사측이 그를 보는 시선이 곱진 않았을 것이다. 또 그가 몸담았던 <한겨레>에서 '언론권력' 시리즈 같은 야심적인 기획물을 통해 <동아>를 포함, 수구언론들을 비판했고, 한국사회의 또 하나의 권력으로 상징되는 '조중동'이라는 명칭을 그가 작명했으니 그에게서 '이쁜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번 3일자 기사에 이런 정황들이 감정적으로 개입됐을 것이라는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가 정 사장 건을 보도한 양태를 보면 그런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만약 이같은 추론, 즉 <동아>가 사적 감정을 내세워 회사 차원에서 '정연주 죽이기'에 나섰다면 <동아>는 언론의 상식을 저버린 '쓰레기 매체'로 치부될 것이다.

최근 <동아>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90년대 후반 미등기 전매를 통해 부동산투기를 한 의혹이 있다고 대서특필한 바 있다. 이 보도는 금년 봄 <세계일보>에서 보도한 내용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어서 '재탕'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여기서 필자는 권 여사를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또 최고권력자 친인척의 비리를 감시하고 지적하는 것이 언론의 본연의 영역이라는 명제에도 이견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타 매체에서 알맹이를 보도한 내용을 다시 보도하면서 1면 머릿기사와 3면 전면에 걸쳐 보도할 만한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보도가 나간 후 청와대의 해명에 따르면, 권여사가 거래를 할 당시에는 미등기 전매가 법으로 금지된, 이른바 '불법'도 아니었다고 한다. 청와대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과잉보도는 물론 이 역시 부정확한 보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비판에 있어서는 추상같은 태도를 보여온 <동아일보>가 자사 식구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기 한없어 보인다. 얼마전 <동아>는 김원기 통합신당 의원(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출신) 등이 굿모닝시티로부터 '구린 돈'을 받았다고 당사자 반론도 없이 내보냈다가 오보로 판명되어 된통 혼이 난 적이 있다.

그러나 <동아>는 이후 사내 징계위원회에서 편집국장 등 관련자들에게 호봉정지와 동일한 효력을 가진 '6개월 승급정지'라는 솜방망이 징계에 그쳤다. 얼마전 <뉴욕타임즈>가 오보 사태로 편집국장이 교체된 사례를 <동아>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최근 국내에서는 한 종교전문지에서 오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 편집국장이 물러난 사례도 있다.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장행훈씨는 최근 <신문과 방송>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적어도 이 정권 출범 이후의 세 신문(조중동)의 보도태도에서는 증오의 냄새가 풍긴다"고 질타한 바 있다. 모르긴 해도 장 전 국장에게 조중동 가운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문제가 있는 신문을 꼽으라면 <동아>를 꼽지 않을까 싶다.

이제 이 글을 접으면서 동아일보측에 달갑잖은 충고 하나를 하려고 한다. 동아일보여, 나중에 봐서 후회할 그런 지면, 역사앞에 죄를 짓는 지면을 더이상 꾸리지 말기 바란다. 일제말기 일본군을 '아군' '황군' 하며 친일보도한 것 지금 돌아보면 부끄럽지 않은가.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때 그들 앞잡이 노릇한 것(물론 반독재투쟁 기사도 더러 있었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낯이 화끈거리지 않는가. 그런데 또 그런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동아일보>에 적으나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 단 몇이라도 있다면 그런 기사가 실리지 않았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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