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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개발 관련 CIA 문서
북한 핵 개발 관련 CIA 문서 ⓒ 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보관소
원심분리기란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을 농축하는 시설로, 미국은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분리기를 수입해 비밀리에 핵개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작년 10월 초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대북 특사 회담 때 "북한이 처음에는 이를 부인했지만, 미국이 증거를 제시하자 나중에는 시인했다"는 것이 미국측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측의 주장은 거의 '검증'되지 않은 채 사실처럼 굳어져왔다.

그러나 CIA조차 북한의 비밀 핵개발은 '증거'가 없는 '의혹' 단계라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이는 흔히 '북한 핵문제', 혹은 '북핵 위기'로 표현되는 '북-미간의 대결'을 전면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CIA도 인정한 것처럼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북한의 핵개발은 어디까지나 '의혹'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핵문제가 북미관계는 물론이고 남북관계, 북일관계도 휘청거리게 하면서 한반도에 전쟁 먹구름을 드리우고 첨예한 남남갈등을 야기한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핵 문제를 푸는 것이 평화와 번영의 전제조건이 되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석연치 않은 문제의 발단을 규명할 필요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켈리의 기자회견

제임스 캘리 미국무부차관보
제임스 캘리 미국무부차관보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핵 파문을 몰고 왔던 당사자인 제임스 켈리는 부시 행정부의 발표 한달 후인 2002년 11월 19일에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북한측에 제시한 근거가 북한과 파키스탄 간의 핵 프로그램 거래 내용을 담은 것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북한 관리들과 대화할 때,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는 언급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켈리가 북측에 제시한 근거가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거래 내용을 담은 무역 신용장이었다는, 핵 파문 후의 미국 정부 관리들의 일부 주장과 언론 보도가 대부분 오보였음을 켈리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그는 또한 증거 제시 여부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여러 차례 발제(presentation)를 했다"고 말한 바 있어, 미국이 증거를 제시하고 북한이 결국 이를 시인했다는 통설에 의문을 던져준 바 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CIA의 메모는 결국 증거도 없이 북한을 몰아붙였다는 것을 사후 확인시켜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를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핵 파문 이후 북한이 철저하게 '모호성'을 유지한 것도 의혹의 확대재생산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CIA의 메모를 통해 "미국이 증거 자료를 가지고 북한의 시인을 받아냈다"는 통설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따라 핵문제의 발단과 성격을 재조명할 필요는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기실 핵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비밀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 못지 않게, 미국과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북한에 특사를 파견한 2002년 10월 정세로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왜 미국은 대북 특사를 파견했나?

2002년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이 있은 뒤 긴장과 유화 국면을 오갔던 한반도 정세는 2002년 하반기 들어 화해협력과 평화라는 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북한이 2002년 6월 29일 발생한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이후에 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개최, 경평 축구 대회, 부산 아시안게임 북한 참가, 태권도 시범단 교류 등 교류협력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9월 들어 남북한이 경의선, 동해선 철도와 도로 연결 공사를 동시에 착공하고, 이를 전후해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를 잇는 철의 실크로드 사업 구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한반도가 동북아의 중심 국가로 부상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감도 일기 시작했다.

또한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외교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이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을 통해 북일 정상회담을 갖고 납치자 문제와 전후 보상 문제 해결의 큰 틀을 잡으면서, 남북 관계에 이어 동북아 냉전구조의 또 다른 한 축인 북-일 간의 대립 관계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정세는 북한의 신의주 경제특구 지정, 7.1 경제개선 조치 발표 등 북한의 개혁·개방 움직임과도 맞물려 있었다.

북한과의 협상을 중단하고 '악의 축' 발언, 선제공격 전략 채택 등 강경책으로 일관하던 부시 행정부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미국 국내에서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라는 요구가 높아졌다. 이에 부시 행정부는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켈리의 손에 '핵카드'를 쥐어주고 '반전(反轉)'을 모색한 것이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를 반전시키는데 성공해, 남한과 일본의 대북 접근을 제한시키고,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등 군비증강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실체도 없는, 그리고 실체를 규명하기도 힘든 고농축 우라늄 '핵카드'를 가지고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이다. 이는 최초의 핵카드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꺼내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북한은 부인하지 않았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이 핵개발설을 강력하게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북미간의 특사회담을 재구성해보면, 미국 특사에게 잔뜩 기대를 걸었던 북한은 미국이 비밀 핵개발설을 들고 나오자 크게 당황하면서 부인했다.

그러나 미국측에서 계속 이 문제를 들고 나오자, 최고위 관계자들이 철야 대책회의를 열고 자신도 핵카드를 꺼내들기로 한 것이다.

북한이 회담 이틀째에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계속되면 "핵무기는 물론이고 이것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발언을 두고 미국은 북한이 비밀 핵개발을 시인했다고 해석한 것이고, 북한은 원칙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동시에 북한은 주한미군의 주둔까지 용인하겠다면서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의지를 피력했으나, 미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측의 제안을 공개하지도 않았다.

북한이 이처럼 비밀 핵개발설을 부인하지 않고 이를 '카드화'한 것은 우선적으로 핵카드를 제외하면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낼 마땅한 지렛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국의 적대정책이 계속될 경우 억제력 차원에서 핵무장을 시도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고농축 우라늄과 관련해 철저하게 '모호성'으로 일관했던 북한은 지난 8월말 베이징 6자회담에서 이를 공식 부인했다. 핵 파문이 불거진 지 10개월 만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발표 내용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핵문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미국과 북한의 의도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핵카드를 꺼내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삼아 대북한 적대정책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고, 마땅한 수단이 없었던 북한은 미국의 핵카드를 넘겨받아 이를 미국과의 담판짓기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 6자회담의 저면에 깔려 있는 핵심적인 갈등 요소이기도 하다. 동시에 고농축 우라늄 문제는 핵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들 경우,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은 사찰 및 검증 자체가 대단히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그 진위를 밝히는 것도 정치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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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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