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 로마에 자리잡고 있다. 비록 규모 면에서는 세계 최소지만, 전세계 카톨릭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어떤 나라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바티칸 시국에는 그 명성과 영향력에 걸맞는 바티칸 박물관이 있다.
그곳에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이 두 예술품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가 있는데, 나는 운 좋게 여행가이드를 통해 그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게 되었다. 일화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다고 하니, 그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들어주기 바란다.
교황 율리시스 2세는 당시 최고의 미술가로 꼽히는 브라만테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의뢰했다. 당시의 미술가들은 건축과 조각, 그림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있었다.
조각만은 최고로 인정 받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미켈란젤로가 브라만테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젊은 미켈란젤로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의뢰 받은 천장화를 미켈란젤로의 콧대를 꺾어놓을 속셈으로 미켈란젤로에게 떠넘겼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이 천정화를 거절하리라 예상했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이를 수용한다고 해도 결국 졸작을 남기게 되리라 여겼다.
미켈란젤로는 천정화 그리기를 수용하는 대신 하나의 조건을 내세웠다. 그건 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무도 시스티나 성당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건은 받아들여졌고 미켈란젤로는 성당 안에서 문을 닫아 걸고 천장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문으로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식사만이 전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4년 6개월에 달하는 창조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천장화를 그리기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때, 교황 율리시스 2세가 시스티나 성당에 들렸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그리고 있는 천장화를 감상하기 위해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교황의 권세에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었다. 교황은 삼중관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모든 백성의 아버지, 모든 왕의 지배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약속과 달리 성당 문이 열리고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교황을 보았다.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붓을 꺾어 집어 던져버렸다.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에 교황 역시 화를 내며 미켈란젤로를 그의 집으로 내쫓아버렸다.
하지만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교황은 그를 내쫓은 후, 1시간여 동안 천장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천장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이 수놓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교황은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버리고 미켈란젤로의 집으로 야행(夜行)을 나갔다. 그리고 그에게 간곡하게 다시 천장화를 그려줄 것을 부탁했다. 미켈란젤로는 다시 붓을 들었고, 그 이후로 천장화가 완성될 때까지 아무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없었다.
여행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보았던 <천지창조>는 한층 더 마음에 와닿았다. 누운 상태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어서 미켈란젤로는 석고 분진 때문에 시력이 많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천장화를 감상하기 위해 목을 올리는 것도 힘든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투자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황 앞에서도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보면서 나는 내 인생의 <천지창조> 천장화를 잘 그려나가고 있나, 나는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나, 내게 반문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