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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지역에 살고는 있지만 나는 농민은 아니다. 청년 시절 농가에 가서 모내기와 벼베기 등 일손을 도와 준 적은 여러 번이지만 스스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한 번도 없다. 농토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다.

읍내에서 다른 확실한 생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제적 여력으로 일찍이 장만한 농토를 남에게 빌려주지 않고 자신이 직접 벼농사를 짓는 분들도 내 주변에는 여럿 있다. 수의사를 하시는 한 분은 사람의 주곡 양식을 자신이 직접 경작하여 얻는다는 사실에서 각별한 희열 같은 것을 느낀다고 했다.

경작할 수 있는 농토를 가지고 있는 기분, 스스로 땀 흘려 경작을 하고 소출을 얻는 기분, 자신이 경작하여 얻은 쌀로 밥을 지어먹는 기분… 그런 것들의 질량이나 농도 따위가 나는 괜히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내 조부 때만 해도 농토를 꽤 많이 가진 부농이었는데, 어쩌다가 조상 대대로 지어먹은 논과 밭이 단 한 평도 조실부모한 내 선친에게조차 상속되지 못하였는지, 생각하면 섭섭하고도 애석하다. 선조들의 땀방울이 어려 있는 그 전답을 한 평도 되찾지 못하고 세월만 보낸 내 무능은 또 무언지….

농민이 아니면서도 조금은 농민 행세를 해온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하여 나름대로 활동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농업에 대한 막연한 향수와 내 가슴에도 연면히 흐르고 있는 농경민족의 정서 같은 것의 작용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비록 경작농민은 아니지만 늘 농민의식을 지니고 흙을 사랑하며 살려고 나름대로 애쓰다 보니 농민들에 대한 일종의 외경심 같은 것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농민들을 존경하며 사랑한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 유지를 기본적으로 가능케 하는 양식을 가꾸고 거두는 그 소임만으로도 그들은 어느 부류의 사람들보다 귀한 사람들이다. 또한 조물주의 창조 질서에 누구보다도 순응적으로 부합하며 사는 그 삶의 방식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다.

밥을 먹으면서 때때로 떠올리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밥상머리 교육'이다.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의 바른 자세와 식사 태도에 유난히 신경을 쓰셨다. 언제나 다리를 개고 똑바로 앉은 자세로 밥을 먹어야 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번갈아 쥐고 사용해야지 한꺼번에 쥐고 사용했다가는 야단을 맞았다. 밥풀을 흘려서는 안되었고, 밥그릇에 밥풀들을 붙여놓은 채 숟가락을 놓아서도 안되었다.

아버지는 가끔 농사 이야기도 하시곤 했다. 농민들이 봄에 볍씨를 내는 일부터 가을에 타작을 하기까지의 그 어렵고도 힘든 농사 과정을 설명하며 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강조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농민이 아니었고 논 한 마지기 밭 한 뙈기 갖고 있지 못한 처지였지만 농민들에 대한 생각이 각별했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던 듯, 아버지는 농업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농민의 후예임을 말했고, 조실부모한 탓에 가세가 급격히 쇠락하여 장형(長兄)의 가족들과 헤어져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했던 당신의 소년 시절 이야기도 했다.

밥을 먹으면서 가끔 떠올리는 것은 또 있다. 내 어렸을 적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뒤란 우물 옆에서 쌀을 씻다가 쌀알들을 몇 톨 흘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쌀그릇을 내려놓고 손으로 그 쌀알들을 일일이 주워담았다. 내가 그까짓 것 그냥 버리지 않고 왜 힘들게 일일이 주워담느냐고 했던 듯, 어머니는 말했다. "곡식을 몇 톨이라도 함부로 버리면 죄로 간다." '죄로 간다'는 그 말이 그 순간 내게 묘한 충격을 주었던 듯싶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밥 간수를 잘못하여 몹시 쉰 탓에 먹을 수 없게 된 한 그릇 정도의 밥을 잿간에다 버리는 이웃집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그 밥을 앞치마로 가린 채 들고 나왔고, 잿간에 버리고서도 보이지 않게 재로 덮었다. 그 이유를 내가 물었던 듯, 할머니는 말했다. "하느님이 보시면 죄로 가니께." 훗날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런다고 하느님께서 그걸 모르실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곤 했다.

1980년 경기도 남양만의 한 굽이 바닷가 간척공사장에서 일년 정도 노동을 한 적이 있다. 공사 지휘를 한 토목기사 영감님의 모습을 지금도 밥 먹을 때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분과 어울려 한 상에서 식사를 한 적이 많은데, 그 분은 밥상 앞에 앉으면 언제나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곤 했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성호를 한번 긋는 것으로 기도를 마치는데, 그분의 기도는 매번 내 기도보다 길었다.

처음에는 그 분이 개신교 신자인 줄 알았다. 한 번은 개신교 중에서 어느 교회 신자시냐고 여쭈었더니 그 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신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했다. 불교 신자도 아니고 무종교인이라고 했다. 그러신 분이 왜 밥상 앞에 앉으실 때마다 기도를 하시느냐, 누구에게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기도를 하는 게 아니고 땀흘려 농사를 지어 자신에게도 밥을 먹게 해준 농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한다고 했다.

아무런 종교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밥상 앞에 앉을 때마다 농민들을 위해, 농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는 사람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1980년 일년 동안 경기도 남양만의 한 굽이 간척공사장에서 함께 생활했던 토목기사 조 영감님을 잊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며칠 전부터 햅쌀밥을 먹고 있다. 확실히 햅쌀밥은 다르다. 누구라도 첫 숟갈부터 햅쌀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맛이 좋고도 확연하다. 햅쌀도 나름이라서 기계로 말려 찧은 쌀이라면 아무래도 맛이 덜할 것이다. 햇볕에 정성스럽게 말린 벼는 밥맛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며칠 전에 오래 두고 먹었던 묵은 쌀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묵은 쌀을 깨끗이 다 털어먹고 햅쌀을 구입하자고 했다. 쌀이라는 게 참 묘해서 생산된 지 일년쯤 지나 햅쌀이 나올 때가 되면 묵은 쌀로 짓는 밥은 더럭 맛이 없다는 말도 어머니는 했다. 그런 밥맛의 차이까지 분별하시는 어머니께 나는 야릇한 경이를 느끼며, 내일 방앗간에 가서 햅쌀을 구입해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동생이 쌀자루를 메고 들어왔다. 남산리 처가에 갔다 왔노라고 했다. 그 사돈댁에서 사위 편에 우리 집으로 올해도 햅쌀을 보낸 것이었다.

농업을 하는 남산리 사돈댁에서는 해마다 벼 수확을 하면 햇볕에 잘 말린 벼를 찧어서 그 '시릅쌀'을 맨 먼저 우리 집에 한 가마니 정도씩 보내 주시곤 한다. 올해도 그러신 것인데, 남은 묵은 쌀을 톡 털어서 내일 아침밥을 지으려고 겨우 앉혔는데 마치 그걸 아시기라도 한 것처럼 햅쌀을 보내 주셨다며, 어머니와 아내는 그 사실을 신기해하기까지 했다.

사돈댁에서 보내 준 햅쌀로 지은 밥을 처음 먹던 날은 점심상을 놓고 앉아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 전 기도'를 하며 남산리 사돈댁에 축복을 드렸다. 그리고 저녁에는 성당에 가서 우리 가족은 개별적으로 '농민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올해는 궂은 날이 많았고 비가 많이 내려서 농사짓기가 더욱 어려웠음을 잘 알고 있다. 농민들은 많은 시름과 애로 속에서 올해 농사를 지었다. 남산리 사돈어른은 햅쌀 속에 작고 검은 알갱이가 조금 섞인 것은 잦은 비로 인해 쭉정이가 많이 생긴 탓이라고 했다.

멋이 썩 좋은 햅쌀밥을 먹으며 첫 수확한 햅쌀을 보내 주신 남산리 사돈댁에 다시 감사한다. 그리고 농민 모두에게 감사한다. 온 국민이 오늘도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땀 흘려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일임을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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