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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앞에 콩이 쌓여간다.
선풍기 앞에 콩이 쌓여간다. ⓒ 전희식
정말 콩은 콩알만 했다. 깨는 깨알만 했고.

출판 기념회다, 외지에서 온 손님들 접대다, 산판에 땔감 실으러 가랴 또 길동무의 보따리학교 예비학교가 예고 없이 이틀간 열려 이것 돌보랴 그래서 거들떠 볼 겨를이 없다가 오늘에야 겨우 콩하고 깨를 다 까불었다.

그동안 타작을 해서 마루 밑에도 넣고 마루 위에도 얹고 또 리어카에 실어둔 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다 꺼내서 따가운 햇살에 눈 찌푸려가며 전부 다 까불어서 자루에 넣었다.

곡식을 갈무리해서 자루에 넣고 보니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콧구멍은 시커먼 먼지 덩어리가 뭉쳐 나왔지만 기분은 가을 하늘만큼 개운해진 하루였다. 물론 밭에는 아직도 타작하지 않은 검정콩이 남아 있다. 서리태도 제법 되고 들깨도 100여 평 타작을 못하고 있다. 날씨가 너무 좋다보니 자꾸 미루기만 하는데 이러다가 날벼락 맞지, 농사일이라는 건 미루는 게 아닌데 철을 어기다가 낭패 보지 싶어 항상 마음을 졸인다.

숨죽인 바람, 목덜미고 파고드는 까시래기

옛날에는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솔잖게 불어 밭이건 앞마당이건 그냥 바람에 날려서 콩이랑 깨랑 알곡을 가려냈는데, 세상이 뒤숭숭해서 그런지 바람도 안 분다. 비자금이다 대선자금 수사 확대다 난리가 법석이다 보니 바람도 숨을 죽인 것일까?

근데 오늘은 바람이 내리치다가 어느새 올려치기도 하고 내 몸을 기둥 삼아 회오리치기도 해서 도저히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전기를 안 쓰고 기름도 안 쓰는 게 생태농을 하는 사람들의 원칙이지만 할 수 없이 나는 선풍기를 꺼내 와서 바람을 부쳤다. 먼지가 내 몸을 기둥삼아 콧구멍을 향해 솟구쳐 올라오는 데는 별 도리가 없었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까시래기들이 땀구멍마다 박혀와 봐라. 까지래기에 장사 없다.

큰 양은대야에 하나가 차면 자루에 넣는다.
큰 양은대야에 하나가 차면 자루에 넣는다. ⓒ 전희식
선풍기 앞으로 노란 콩알들이 소복소복 쌓였다. 콩이 작은 더미를 이뤄 쌓일 때마다 어찌 그리 예쁜지 토실토실한 콩알들이 마당에 깐 '갑빠' 밖으로 굴러가면 이놈아 게 섰거라 쫒아가서 주워 오곤 했다. 나중에 작업 끝내고 한꺼번에 주워와도 되겠지만 혹시라도 계속 주변을 얼쩡거리는 닭들한테 빼앗길까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마당에는 닭 네 마리와 진돗개 한 마리가 하루 농사 같이 짓는다

처음에는 콩이 먹기에 너무 크고 딱딱한지 쪼아 보고는 그냥 뱉어 내고 하더니 저녁 때쯤에는 이제 끝물 장사다 싶은지 이놈들이 콩알을 막 주워 먹는 것이었다. 닭들은 아무리 쫒아도 옆으로 한 발짝 옮겨 앉는 걸로 내 체면치레를 해줄 뿐 소용이 없으니 내가 일일이 단속을 해야 한다.

그래서 슬리퍼도 날아가고 옆에 두고 까먹던 귤껍질도 날아가고 고함을 치면서 내 굵은 침도 튀고 했는데 얻어맞을 때도 있지만 잽싸게 살짝 한 쪽 발만 들고 피할 때가 더 많다.

아! 누가 닭대가리라고 했던가. 저리 영리한 동물을 말이야. 맞아 누구는 소의 꼬리보다 닭의 머리가 되라고 했지. 소꼬리곰탕보다 닭백숙이 낫다는 말인가?

진돗개 금이가 사정거리 안에 오면 가차없이 물어 죽여버리려고 호시탐탐 노리지만 닭은 단 한번도 진돗개의 노림수에 걸려든 적이 없다.

바로 이런 것들이 집안일을 하면서 맛보는 별미다. 눈과 귀를 항상‘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하는 여러 일거리들이 꽉 차 있는 것이 농가 집안 일이다. 상념이 비집고 들어 올 틈바구니가 없다.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이 변함없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이 변함없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전희식
들깨를 바람에 날리는데 우당탕탕 곶감 채반지가 굴러 떨어져 뛰어 가 보면 이제 꼽꼽하게 말라가던 곶감들이 마당에 나뒹굴어 흙이 묻고 작은 모래가 촘촘히 박혀 곶감이 곰보딱지가 되어 있다. 하나씩 다 털어 내야하고 곶감 채반지를 엎지른 달구새끼들 악을 몇 번 써서 혼도 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집 진도개 금이 식사시간이 되어 마당 구석에 걸어 둔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늙을 가망이 없는 푸른 생 호박 칼로 삐져 넣고 장작 두어 개 모아 놓고는 다시 선풍기를 돌린다.

이건 완전히 스테레오에다가 멀티에 1인 3역이 요즘 농가 일이다

콩을 갈무리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만약 말이야. 수 백 년 흘러 먼 훗날에 말이야. 그때 가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속담이 사라질까? 그 자리에 ‘자동차 공장에서 자동차 나오고 신발공장에서 신발 나온다’라는 속담이 들어앉을까?

또 이런 생각도 났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곰보가 된 동네 형이 있었는데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콩 타작하다 콩 널어놓은 멍석에서 엎어졌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콩 작업하면서 허투로 뛰어다니거나 하면 자빠져 다친다는 말이었구나 싶었다.

이젠 콩이 물러나고 들깨가 등장했다.
이젠 콩이 물러나고 들깨가 등장했다. ⓒ 전희식
오전 11시경. 한참 일을 하는데 전북일보 문화부장이자 ‘문화저널’ 편집장인 김은정 기자가 사진기자와 함께 왔다. 인터뷰하자는 연락이 먼저 있었던 것이라 일손을 놓고 또 사진 찍고 묻는 말에 답하고 차 한 잔 꺼내 와 마시고 하느라 또 시간을 보냈다.

바람결에 왔다 바람처럼 떠나간 **스님

오후에 전화가 왔다. 난데없는 **스님이셨다. 책 한 권 얻으러 왔다는 것이다. 나랑은 아주 오래 전 아봐타 수련을 함께 했던 전남 어느 절 주지스님이신데 마루에 가득 쌓인 누렁호박들을 보고는 두 개를 골라 들고 가 버렸다.

공짜 호박에 공짜 책에다 사인까지 받고 보니 스님은 입 봉사라도 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몇 번 더 공치사를 하시더니 끓여 준 라면을 국물까지 다 마시고는 해가 설핏하자 자리를 떴다.

다시 한참 일을 하는데 ‘전북저널’이라고 전화가 왔다. 내일 인터뷰하러 가고 싶다는 전화였다. 인터뷰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연일 지방신문에는 한 면을 독차지하면서 내 사진이랑 책 기사가 실리고 있다. 특히 아주 독특하고 재미있게 진행된 출판기념회가 화제가 되고 있다.

오늘 전북일보의 기자도 내 특이한 이력과 책에 담긴 관심 초점이 주요 화제가 되었다. 어제 인터뷰했던 새전북신문의 김선희 기자도 나의 출가생활과 인터넷 사업과 생태농업을 연결짓기 위해 무척 고심하면서 인터뷰 내내 질문을 되풀이하곤 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일 찾아오는 기자와도 이런 식의 문답을 주고받지 않을까 싶다. 해야 할 일이 방해받지 않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부서진 담장을 고칠까 아니면 나무를 자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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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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