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몇 잔 들이키고 나자 우린 제법 호기로워졌다. 문병란 선생도 자기야말로 진정한 민족시인이요, 민중시인이라는 약간의 자기과장을 섞어 척박한 현실을 질타했다. 아마도 추측컨대 그때는 시인이 조선대, 광주일고 등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나마 겨우 발붙인 학원에서마저 등을 내돌린 직후인지라 이런 류의 과장으로라도 자신을 곧추세우는 순간이 필요했는지 모를 일이다.
시인은 나에게, 작년(1973)에 나오려다 정보부에 모조리 압수 당해 겨우 한 권 남았다면서 하드 커버가 약간 떨어진 <정당성>이란 시집을 선물로 주었다. 시집의 내용은 일본의 국기인 히노마루로 대표되는 일 제국주의와 유신독재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가득 찬 것이었는데 그 시집은 누군가 집어가 버리고 안타깝게도 지금 내 머리 속엔 딱 한 귀절밖에 남아있지 않다.
하루 콩나물 밥 세끼를 먹고도 /난 용케도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민주화된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별 것 아닌 이 귀절은 그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문구였다 할 수 있었는데, 시인은 아무튼 흠없는 책을 주지 못해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속지에다 이렇게 사인을 해주셨다.
破本(파본) 안병기님에게, 문병란 드림
파본이란 이를테면 겉표지가 손상됐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 귀절이 빌미가 되어 이후 우리 집에 놀러와 이 시집을 본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破本"이라고 부르며 놀려대곤 했으니 그렇게 나의 호는 졸지에 "파본'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파본-망가진 놈이라… 수리불가라… 무릇 세상의 시인이라 칭하는 자들에겐 예언자적 선견지명이 있다더니 문병란 시인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나이 값도 못한 채 '파본'인 채로 생을 어기적 뚱기적 거리며 살아갈 줄을 시인은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말나온 김에 아예 내 인터넷 닉네임을 '늑대별' 대신 파본으로 교체해 버릴까보다!).
그 후로 두어 번 정도 더 시인을 찾아갔던가. 얼마 후 광주를 떠난 후로 나는 문병란 시인을 더 이상 만나 뵙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영욕으로 가득 찬 시대를 결코 꺾이지 않고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질타하며 핍박받는 민중과 5월 광주를 노래해온 문병란 시인. 세상을 낙관도 비관도 없이 흔들흔들 걸어가던 내 나이 스물하고도 하나였을 때 만난 아름다운 정신이었다.
문병란 시인의 시 <직녀에게>는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광주의 노래패 <소리모아>의 박문옥('누가 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할까'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이 문병란 시인의 시에 바탕을 두고 작곡한 것을 역시 광주의 민중가요 가수 김원중이 부르는 <직녀에게>라는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문병란 詩 <직녀에게> 전문(全文)
가슴은 이념 보다 훨씬 더 솔직하다. 그 솔직한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는다면 우리가 타고넘지 못할 장벽이 어디 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라는 한 마디 말이, 그 조용한 비유가 가슴에 와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