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를 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개인의 부와 명성, 그런 성공의 기틀은 개인의 자질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들이 바뀌게 되었던 건 우연히 집어들었던 한 권의 책이었다. 대학생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 목록에 <전태일 평전>을 발견하고 대학생이 된 기분을 내기 위해 우연히 펼쳐들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왠지 모를 분노와 부끄러움, 매우 복합적인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책을 덮었을 때에는 가난이란 것이 꼭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난 참 '바보'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태일, 아팠지만 아름다운 그 이름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청계천 평화시장 한 편에서 23살 전태일이란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 기준법 보장하라”를 외치며 차가운 시장 한가운데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청년은 다음날 성심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1970년은 박정희 정권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표면적으로는 개발에 따른 경제성장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개발에 따른 경제성장은 많은 노동자들에 인간적 삶을 담보로 진행되었던 보이지 않는 착취에 의한 성장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당시 암묵적으로 이루어 졌던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력 착취와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한 노동현실을 죽음이란 수단으로 고발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의 청계천에서는 닭장 같은 좁은 공간에서 열서너 살의 어린 여공들이 졸음을 참아가며 14시간 이상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한참 성장할 나이에 여공들이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는 작업장에서의 일한 대가는 커피 한 잔 가격인 50원이 전부였다.
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전태일의 가슴엔 어린 여공들의 현실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7000원 월급을 포기하고 4000원을 받는 재단보조로 청계천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도 어린 여공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재단사가 되어도 실질적으로는 여공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신의 차비를 털어 점심도 변변히 먹지 못하는 여공들을 위해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에서 미아리까지 걸어 다녔던 전태일이었다. 전태일도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는데도 가끔 걸어가다 통금에 걸려 유치장 신세를 졌던 그런 전태일이었다.
어느 날 피를 토하며 쓰러져 그냥 버려지는 여공을 보면서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뜬다. 청계천 노동현장에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같은 청계천 노동자들을 모아 바보회와 삼동회를 결성한다. 사업장 안에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며 노동청과 신문사를 찾아가지만 전태일과 청계천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분신이란 극단적 방법을 통해서 당시 인간다운 대접도 못 받는 노동자들에 현실을 고발한다.
조영래,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다
전태일이 분신을 했을 때, 조영래는 절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태일의 장례가 서울대 법대 주관으로 치러졌을 때 조영래도 장례식에 참여했다.
71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조영래는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자마자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1년 6개월에 실형을 살게 된다. 출소한 조영래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에 가담하게 되고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를 받고 1979년 10월 수배가 해지되는 순간까지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이 도피기간동안 그가 쓴 것이 전태일 평전이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씨를 만나고 당시 전태일과 함께 했던 청계천 노동자와 청계천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기 위해서 청계천 일대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본 것은 낮은 곳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현실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며 때로는 지식을 전달해 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들로부터 삶의 귀중함을 배웠다.
79년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수배해제와 함께 복권이 되고 82년 변호사를 시작하면서 조영래는 항상 어려운 이들을 위해 열심히 뛰어 다니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1984년에 망원동 수재민 소송사건, 상봉동 박길례씨 진폐증 사건, 86년 군사독재의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냈던 부천성고문 사건 등 그가 죽던 1990년까지 많은 일을 했다. 그가 도피 중에 썼던 '전태일 평전'은 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면서 80년 노동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고 부당한 노동현실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은 잘못된 억압에 저항한 시대의 책이었다.
일본에서 먼저 빛을 본 <전태일 평전>
77년 전태일 평전이 완성이 되고 세상에 전태일이란 존재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고 싶었지만 박정희의 유신체제 안에서는 전태일 평전을 세상에 내어놓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시대였다.
결국 일본에 있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과 연락을 하게 되고 77년 크리스마스 전후로 국내에 있던 외국인 신부에 의해 한통련 당시 의장인 배동호 의장에게 전해지게 된다. 원고를 보낼 수 없어 대학노트에 쓰인 평전은 사진으로 찍어 외국인 신부의 기내 짐과 함께 일본에 건너오게 되었다. 총 332장에 달하는 사진이었다.
사진으로 온 평전은 여러 사람의 분담작업으로 원고로 옮겨지고, 원고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송인호씨에 의해 번역작업이 시작된다. 번역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당시 한통련 김경식 문화국장이 전태일 평전을 영화화 할 것을 논의하고 일본 민예를 통해 배우를 섭외한다.
당시 번역이 채 끝나지않은 원고를 들고 민예 배우들을 찾아가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영화에 출연해 달라며 설득하게 되고 당시 사회적인 일들에 관심이 많았던 민예 배우들이 영화화에 적극 동참할 것을 약속한다.
번역작업이 끝나고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경제적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한다. 결국 일본 목사 요시마씨의 도움으로 출판사를 소개받고 책을 발간해서 손해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고서야 겨우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은 작가 조영래의 이름을 기재할 수 없어 가명인 '김영기'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책과 영화를 담당했던 한통련은 가명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작가의 뜻을 살리자는 의미로 조영래의 가운데 글자 '영'을 빌려 김영기란 가명을 만들었다.
영화 제작은 한통련 김경식 문화국장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600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이하 총평)를 찾아가 당시 총평 사무총장이었던 도미쯔가 미쯔오를 만나 영화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총평의장이었던 마케에다 후미오가 상영실행위원회를 만들어 적극 영화제작에 협조해 주었다.
300만 엔을 지원받고 영화화 된 '전태일 평전'은 78년 11월 13일 전태일 서거 8주기에 맞춰 동경 이케부쿠로에서 첫 상영회를 가졌다. <어머니>란 제목으로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아 노동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이소선씨를 소재로 만든 이 영화는 1년 동안 일본 전국 400여개 도시에서 상영회를 개최해서 총 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큰 호응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전태일 평전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인간다움을 위하여
벌써 전태일이 분신을 한지 33년,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나온 지 25년이 지났다. 33년 전 한 꿈 많던 젊은 청년이 인간다움을 외치며 죽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보장하라”라고 알고 있지만,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성심병원 침대 위에서 이소선씨를 바라보며 한 “엄마, 배고파요”였다.
처음 책을 들고 끝자락에 “엄마, 배고파요”란 단어를 보았을 때, 그 가난의 굴레를 경험하진 않았지만 그 아팠던 현실이 몸속까지 스며들었다.
단지 살아가기 위해서 14, 15시간씩 일하며 어두컴컴한 작업실에 벽밖에 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현실이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면 우린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올해만 해도 5명의 노동자와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 모두 33년 전 한 청년의 죽음과 닮아 있다.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했을 때, 그 죽음이 이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전태일이 분신을 했던 33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고 또 노동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해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더 힘든 세상이다.
언제까지 이런 안타까운 죽음이 계속될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오늘도 산 자의 하나로서 죽음 분들을 떠올려 본다. 인간다움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살아있는 자로서의 몫일 것이다.
인간다움을 외치다 돌아가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
| | 서시 '아 아, 전태일'-조영래 | | | 시집 <노동자의 불꽃>에서 | | | | 저
처절한 불길을 보아라
저기서 노동자의
아픔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통곡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 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
끝없는 망서림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의지가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 오른다.
저 황홀한 불꽃을 보아라.
저 참혹한 사랑을 보아라.
저 위해다한 분노를 보아라
아 아, 불길 속에 휩싸이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외치는 저것은 죽음이 아니다.
저것은 패배가 아니다.
저 피,
저 눈물,
저 울부짖음 속에서
싸우는 노동자의 강철같은 심장을
보아라.
거리 거리에서 들끊는
기다림들이, 노여움 들이,
절망을 뚫고 솟은 눈부신
승리가
저기서 소리치며 탄다.
오라, 압제여
네가 저 영원한 불꽃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오라, 가난한 등을 밟고 선
모든 구둣발 들이여.
곤봉들이여, 최루탄. 지하실, 쇠창살 들이여
얼마든지 오라.
네가 저 인간선언의 피외침을
(중략)
당시 일본으로 보내진 평전은 크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전태일 평전이고 하나는 <노동자의 불꽃>이라는 시집이다. 서시 '아 아, 전태일'은 <노동자의 불꽃> 첫 페이지에 나오는 시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