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숲을 없애려거든 마을 사람들부터 죽이시오."
한국전쟁 뒤 울창한 숲에 빨치산들이 숨어들 것을 우려한 아군들이 나무를 베어내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외쳤던 절규다. 마을 사람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가꾸고 있는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泉巖里)에 있는 백암 숲.
이 숲정이는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수목들은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는 듯 곳곳에 패인 주름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오색단풍으로 곱게 물들이며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빨갛고 노란 형형색색의 단풍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한다. 고목나무에 간신히 매달린 채 가느다랗게 떨고 있는 노란 잎사귀들은 빨간 단풍잎과 색의 조화를 이루며 운치를 더한다. 하지만 짧기 만한 가을이 이내 아쉬움으로 바뀐다.
수북히 쌓인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500여년 전의 백암마을을 들여다 봤다. 백암(白巖)마을은 1538년 남평문씨 문창후가 버드나무골(도곡면 월곡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형성됐다고 전해온다.
백암 숲은 조선 인종 때(1544년) 남평문씨가 큰물이 지면 마을로 물이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으면서 하천을 따라 나무를 심은 게 시초.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는 수호신인 셈이다.
3000여평의 널찍한 공간에 푸조나무와 이팝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10여종 165본의 아름드리 나무가 당산나무 형태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문창후 후손인 문경식 천암리 이장은 오래 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는 숲 속에 사람이 들어가면 안보일 정도로 숲이 울창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락을 거둬 우데미 사람한테 일년에 나락 한 가마를 주며 염소나 소가 숲으로 못 들어오도록 숲을 잘 가꾸도록 했기 때문이지요. 큰물이 지면 칠구재 골짜기에서 물이 쏟아져 마을로 흘러들어 숲이 없었으면 마을도 사라지고 없었을 것입니다.”
백암 숲은 특히 이팝나무와 단풍나무와 등 계절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수종들이 많아 사계절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봄이 오면 대여섯 그루의 이팝나무가 하얀 눈꽃을 피우며 때아닌 한겨울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여름이면 삼림욕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숲은 만원을 이룬다.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특히 숲정이 입구에 있는 두 그루의 단풍나무는 백암 숲을 온통 빨간 물을 들이며 수백년의 세월을 마을과 함께 해오고 있어 눈길을 끈다.
화순군의회 김실 의원은 백암 숲에 대한 자랑을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백암 숲은 전국 어느 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데다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고목 곳곳에 생채기가 나있어 외과적인 수술이 시급하지요. 백암 숲은 가꾸고 보존해야할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20여년 전만 해도 숲 안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깊이가 어른 키만 했는데 지하로 수통이 연결돼 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데다 우거진 숲의 그늘 때문에 이 물로 멱을 감으면 여름이면 땀띠가 없어질 정도로 물이 시원했다고 한다. 숲 중간에는 이 마을에 사는 문철주(61)씨가 기증했다는 송계정(松溪亭)이란 아담한 정자가 있다.
숲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로 쌓은 물길도 눈길을 끈다. 마을 사람들은 ‘수리동 도랑’이라 부른다.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든 물길로 몇 해 전에 아담한 조약돌로 단장했다. 하지만 골재 채취를 위해 상류에서 수맥을 자르는 바람에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숲정이 입구에 있는 석축은 과거에 물이 마을로 넘쳐드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석축이 자연스러운 숲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은데다 본래의 역할을 다한 만큼 흙으로 단장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화순군은 1999년 2월 노거수를 보호수로 지정한데 이어 2001년 1월에는 산림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 매년 병충해 방제 등 보호 관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마을 앞 하천을 따라 산책로를 만들고 산책로 주변에 130본의 느티나무를 심었다.
하천 제방도 처음에는 시멘트로 쌓아 미관이나 환경에도 좋지 않아 돌로 다시 쌓았고 숲으로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도 설치했다. 백암마을 주민들은 자체 수칙을 정해 숲정이를 보호하고 있다.
백암 숲은 (사)생명의 숲이 주관하고 산림청이 주최한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숲' 후보에 올랐다. 전국에서 25개 마을 숲이 응모된 가운데 7위안에 들어 1차 심사를 거뜬히 통과한 것이다. 지난달 9일에 열린 현지실사 결과 심사위원들이 극찬한 것으로 알려져 18일께 결정되는 심사 결과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물이 맑아 쏘가리, 꺾지 등 다양한 물고기가 살고 있어 낚시터로 인기를 얻고 있는 지석강과 유황온천으로 잘 알려진 도곡온천이 가까이 있는데다 도로를 끼고 있어 광주시민 등 많은 관광객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는 백암 숲.
풍광이 빼어나 연인들의 데이트장소로도 인기를 얻고 있을 뿐 아니라 야유회나 수련회, 그리고 예비부부들의 웨딩포토 장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