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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꾸반 뻬라후 화산의 중턱에 있는 기생 화산. 바위틈에서 유황 연기가 솟아나오고 있다.
땅꾸반 뻬라후 화산의 중턱에 있는 기생 화산. 바위틈에서 유황 연기가 솟아나오고 있다. ⓒ 정철용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은 여기저기 흩어진 바위덩어리들 사이에서 하얀 유황 연기가 간간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었다. 실망스런 광경에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그 옆의 매점 주인이 “계란 삶아먹고…”라고 또렷한 한국말로 말하면서 계란을 가리킨다. 저 바위틈 끓어오르는 물에 계란을 삶아 먹으라는 것이다.

정말 계란 삶아 먹는 것밖에는 할 일도 볼거리도 없는 그 곳에서 우리는 채 10분도 머물지 않고 돌아 나왔다. 위험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없는 이런 곳을 보여주는데 무슨 교육받은 현지 가이드가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우리의 실망은 돌아 나오는 길에 보조 가이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배낭에서 목걸이와 반지 등 조잡한 기념품들을 꺼내더니 그는 나에게, 아내에게 번갈아 가면서 사라고 졸라댄 것이다. 안 산다고, 그만하라고 분명하게 말했건만, 그는 돌아 나오는 길 내내 우리를 졸라댔다.

족자카르타에서도 느꼈지만 이처럼 인도네시아에서의 여행은 장사꾼들과의 전쟁이다. 멋지고 장엄한 풍경을 기대한 화산 지대에서 멋진 풍경은 고사하고 장사꾼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니 정말 우리의 마음은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처남이 이곳을 추천한 것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정말 화산이 되는 경험을 한번 해보라고 그런 것일까?

따만 붕아, 잘 가꾼 꽃의 공원에서 화를 갈아 앉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우리의 화를 가라 앉혀준 것은 잘 가꾸어진 꽃의 공원, 따만 붕아(Taman Bunga Nusantra)였다. 뿐짝 고개 못 미쳐 찌빠나스(Cipanas)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이 아름다운 공원은 23헥타르(약 7만평)의 부지에 나라별로 그리고 테마별로 잘 가꾸어진 갖가지 정원들과 놀이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만 붕아의 발리 정원의 입구. 특유의 발리식 건축물로 장식되어 있다.
따만 붕아의 발리 정원의 입구. 특유의 발리식 건축물로 장식되어 있다. ⓒ 정철용
15분마다 운행하는 트램(tram)도 있었지만 우리는 좀 더 가까이에서 꽃들과 나무들을 즐기기 위하여 정원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구경을 하였다.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난 물의 정원과 루이 14세 치하의 르네상스식 스타일로 꾸며놓은 프랑스 정원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동양의 정원들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입구를 화려한 건축물로 장식한 발리 정원에는 고요한 명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일본 정원에서도 눈의 즐거움보다는 마음을 응시하게 만드는 정밀(靜謐)이 느껴졌다. 세계 어디를 가나 만나게 되는 일본 정원처럼 우리 한국의 정원도 외국에서 만나 볼 수는 없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일본 정원. 우리 한국 정원도 그럴 수는 없는가.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일본 정원. 우리 한국 정원도 그럴 수는 없는가. ⓒ 정철용
딸아이에게는 이러한 정원의 아름다움도 별반 큰 구경거리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미로(迷路) 정원 앞에서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와, 재밌겠다. 우리 들어가 보자!”

망설이는 우리를 딸아이가 재촉한다. 잘 다듬은 쥐똥나무 울타리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간다. 그런데 한 30분 이상은 헤맬 각오를 하고 들어간 미로 정원은 너무나 싱겁게 길을 열어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미로 정원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흙길은 그 흔적이 너무나 뚜렷해서, 갈림길에서 그 흔적이 이어지는 길을 택해 따라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5분도 안 되어 도착한 미로 정원의 중심에는 물론 황소 머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없었다. 대신 독특한 모양과 색깔의 꽃을 피우는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나무의 꽃을 한참 바라보다가 우리는 다시 미로 정원을 빠져나왔다. 출구로 이끌 아리안느의 실이 필요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너무나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는 미로 정원. 아리안느의 실이 필요가 없다.
너무나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는 미로 정원. 아리안느의 실이 필요가 없다. ⓒ 정철용

따만 사파리, 동물의 왕국을 차를 타고 누비다

유황연기 내뿜는 화산과 아름다운 꽃들 가득한 정원에 이어지는 우리의 자연생태기행은 이번에는 동물원으로 향한다. 토픽은 뿐짝 고개를 쉬지 않고 넘어 내처 달리다가 따만 사파리 표지판 앞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간다.

좁은 길에 아이들이 작은 당근 다발들을 양손에 가득 들고 흔든다. 토픽은 잠깐 차를 멈춰 한 아이에게서 작은 당근 두 다발을 사서 내게 건네준다. 웬 당근? 궁금해하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나는 일반적인 동물원을 예상하고 따만 사파리(Taman Safari Indonesia)의 입구를 통과하자 내릴 준비를 하였는데 토픽은 차를 계속 운전한다.

“야, 얼룩말이다!”

딸아이가 소리치길래, 그쪽을 보았더니 정말 얼룩말이 길 가에 서 있다. 토픽은 속도를 늦추고 내가 들고 있던 당근 다발에서 당근 한 개를 가져간다. 그리고는 창문을 내리더니 당근을 얼룩말에게 내민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얼룩말은 가까이 다가와 당근을 받아먹는다.

아, 그렇구나. 나는 당근의 용도와 이 곳에 ‘사파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했다. 동물원 측에서 운행하는 사파리 버스도 있다고 하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직접 동물의 왕국을 누비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따만 사파리에서 만난 낙타. 먹을 것을 달라고 차창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따만 사파리에서 만난 낙타. 먹을 것을 달라고 차창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 정철용
우리는 낙타와 사슴과 기린 등에게 당근을 먹여주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던 딸아이도 신이 나서 창문을 열고 연신 동물들을 불러댔다. 당근 두 다발이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어떤 동물들은 먹을 것을 내 놓고 가라고 우리 차를 막아서기도 했다.

차는 호랑이와 사자, 곰 등의 맹수들을 풀어 놓은 지역으로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맹수들의 지역에서는 물론 창문을 내리고 먹이를 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중 철책문이 설치되어 있고 군데군데 감시 차량이 서 있기는 하였지만 일반인의 자동차를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에까지 다닐 수 있게 한 것은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자칫 실수로 자동차 창문을 열어 놓은 채 그곳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찔한 그곳을 우리 차는 무사히 빠져 나왔다. 토픽은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코끼리쇼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조련사의 수신호에 따라 그 육중한 몸을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코끼리의 눈이 애처로워 보였다.

두 발로 번쩍 서기도 하고, 다른 코끼리와 함께 재주를 부리기도 하고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밟지 않고 그 사이사이로 걷기도 하는 등 코끼리들은 훈련받은 대로 착실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 나면 조련사는 메고 있는 가방에서 작은 바나나를 꺼내 코끼리들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어떤 놈은 시도 때도 없이 그 가방 쪽으로 코를 내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조련사는 그 코를 때려준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처로웠다.

바닥에 누운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는 코끼리. 그 육중한 몸의 둔중한 움직임에서는 웬지 슬픔이 느껴진다.
바닥에 누운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는 코끼리. 그 육중한 몸의 둔중한 움직임에서는 웬지 슬픔이 느껴진다. ⓒ 정철용
자세히 보니 그 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은 슬픔일까, 아니면 분노일까, 그것도 아니면 체념일까? 다음 세상에서는 너도 인간으로 태어나 코끼리 조련사가 되려무나. 그래서 코를 내미는 코끼리들에게는 양껏 바나나를 먹여주려무나. 나는 속으로 빌어주었다.

이외에도 주변에 새들의 우리와 야외 공룡 전시장 등 제법 볼거리가 많아 보였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바로 차에 올라타고 자카르타로 향했다. 그 길에 비를 만났다. 인도네시아에서 머무는 동안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비는 20여분 동안 세차게 쏟아졌다.

빠른 속도로 차창의 빗물을 걷어내고 있는 윈도 브러시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길은 다시 인공의 세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유황연기 보다 더 매운 매연을 뿜어내는 차들과 푸른 녹색이 안보일 정도로 먼지 가득 앉아있는 찌든 가로수들과 학교와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답답한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는 이상한 동물, 인간으로 가득 찬 도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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