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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통해 역사와 민족을 말하는 것이 우스워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문학이 역사와 민족을 말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장르의 예술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소설가 윤정모는 최근 장편 <수메리안>을 통해 역사와 민족이라는 문제에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11월 18일부터 그의 작품을 연재한다. 출판 전 귀한 원고의 게재를 흔쾌히 수락한 작가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편집자 주>

벌판을 지나 언덕으로 오를 때 왕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 의식은 잔인했다. 먼저 일깨워준 것이 자신은 지금 적지로 끌려간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우르를 지켜야 할 왕이었다.

왕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도시는 이미 저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만신 전의 성탑은 잘 보였다. 3단계로 높이 솟은 그 계단 꼭대기에는 성단이 있다. 그것은 증조할아버지 우르 남무께서 세우고 슐기 할아버지께서 완성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성탑이었다. 아카드와 야만인 구티 인으로부터 '검은 머리 사람들'의 나라를 되찾은 뒤 모든 신들을 다시 모셔왔고 그리고 기약한 곳이었다.

'이제 수메르는 영원할 것이다!'

그때 호송인이 수레로 뛰어올라 왕의 따귀를 갈겼다. 앞만 보라는 뜻이었다. 사실 적들도 두려웠던 것이다. 왕이 그곳의 신들을 부른다면, 애절하게 부른다면 신들이 이 폐위된 왕을 다시 도울 지도 몰랐다. 더욱이 그 성탑 뒤쪽에는 이난나의 신전도 있었다. 이난나 여신은, 아카드 인들이 이슈타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 여신은 변방의 모든 국가들도 두려할 만큼 그 위력이 대단했다.

왕은 다시 해를 우러러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버지 신 엔릴이여, 제가 잡혀가나이다. 구해주소서! 수호신 난나여, 태양신 우투여 저를 구해주소서. 저의 선조를 구해주셨듯이 그들에게 힘을 주셨듯이 오, 부디 저에게도…. 그러면 저 또한 이 우르와 수메르의 전 도시에 더 높은 성탑을 올리겠나이다. 오 신이여 부디…."

왕이 처절하게 호소했음에도 자신을 태운 수레는 멈춰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보고 싶지 않은 광경들만 왕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토임을 자랑하던 성밖의 들, 누렇게 익어가던 보리밭과 채소밭은 온통 짓이겨져 있고 마을들은 불타 연기를 뿜고 있었으며, 남자들은 학살당했고 여자들은 끌려갔다. 성안 사람들에게 날마다 신선한 우유와 버터를 제공하던 가축우리도 파괴되었고 짐승들은 적들의 군량식으로 도축되었다. 거리엔 어미를 잃은 아이와 어린 송아지들이 힘없이 울고 다녔다.

"오오, 신들이여, 이 어찌된 일이오니까? 단 한번의 예고도 없이 이런 일이, 이런 일들이…."

왕의 호송마차가 강가에 이르렀다. 그 강은 유프라테스 강이 또 다른 강줄기와 만나는 지점이었다. 물살이 급했고 강물은 쉭쉭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다. 강가에 정박되어 있던 커다란 뗏목도 물살에 흔들리고 있었다.

말들이 주저하자 호송원이 채찍을 갈겼다. 왕의 수레가 뗏목위로 뛰어올랐다. 호송원들 오르자 뗏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뗏목이 강 저쪽에 닿았다. 수레가 강변으로 내려갔고, 왕을 태운 수레는 점점 멀어져갔다.

수레가 완전히 사라진 이 후 그 자리엔 두 개의 소문만 남았다.

'왕은 엘람으로 끌려갔다.'
'왕은 엘람 국이 아닌 그 너머 수사 국으로 잡혀갔다.'
엘람은 거기서부터 5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여사제 닌후

여신 이난나 신전 옆에는 여사제관이 있었다. 아주 화려하게 지어진 이 사제관엔 보통 백명 안팎의 여사제들이 기거했다. 그녀들은 이난나 여신을 신봉하는 자들이며 여신 축제에 따른 모든 행사를 대행했다.

그날, 해가 막 떠오를 때쯤이었다. 이 여사제들에게 신전 경배실로 가서 기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닥쳤다는 것이었다. 평화와 안일에 젖어 여신만 찬양하던 그녀들에겐 뜻밖의 일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닌후도 머리 숄을 챙겨들고 허둥지둥 사제관을 나갔다.

여신의 신전은 사제관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신전이란 늘 평지의 산처럼 지어지지만 이난나의 신전은 특히 그 치장에 모든 공력을 바쳤다. 이 여신은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신이기도 해서 장인이나 건축가들은 그녀에게 최고의 미를 바치려고 애를 썼고 그리하여 날마다 창조의 혼을 불태웠다.

닌후는 걸음을 멈추고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신전의 넓은 벽 둘레가 무지개로 피어났다. 해가 동녘에 있을 때면 늘 그런 조화를 부렸다. 벽 자체가 무지개 색 유약으로 지어진 때문이기도 했지만 햇살에 닿으면 그 광채가 도성 밖까지 뻗쳤다.

닌후의 얼굴에 한 가닥의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무지개가 잘 살아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경배실은 신전 지하실이었다. 그녀는 둥글게 휘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 가끔씩 벽을 올려다보았다. 그 통로의 동물 벽화도 평화로워 보였다.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도, 양들도 아침 햇살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좀더 안정되었고 경배실 앞 석상 앞에 섰을 땐 꿈을 꾸는 듯한 예의 표정이 조금씩 되살아나기도 했다.

아치형 경배실 입구로 들어서자 미용담당자가 서서 여사제들 눈가로 커다란 역청 띠를 그려주고 있었다. 그 절차는 무엇이든 정확히 보라는 뜻으로 수메르 인들이 행하는 관습이었다.

닌후 차례였다. 그녀 눈가로 붓끝이 지나갔다. 감촉이 시원했고 코끝으로 오는 냄새는 향기로 왔다. 그것은 역청에 향수를 넣어 특수 제작한 것임으로 세수를 하기 전에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눈띠 그림이 끝난 여사제들은 머리에 숄을 쓰고 조용히 경배실로 들어가 성단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닌후도 무릎을 꿇고 앉은 뒤 손을 뻗어 머리 숄을 만져보았다. 양 옆으로 흘러내리는 주름단도 귀밑까지 똑바로 닿아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위치였다.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 정면은 여신 이난나의 벽화였다. 그 벽화는 형광물질로 채색되어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잘 보였다. 그 풍요의 여신 이난나는, 모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그 힘센 여신은 언제나 그러하듯 지금도 무지개 한쪽 끝을 손에 잡고 다른 한쪽 끝을 하늘로 쏘아올리고 있었다. 닌후는 독백을 시작했다.

"여신이여, 여신이여! 나라가 위급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왕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옵니까? 왕비가 아프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왕자라도? 오, 여신이시여, 부디 저를 안심시켜 주십시오. 왕에겐 아무 일도 없는 것이지요? 정녕 그러하지요?"

닌후는 이비 신왕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왕과 함께 '신성한 결혼식'을 올린 뒤부터였다. 그 행사는 석달 전에 있었고 사랑의 열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닌후는 비록 '신성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도 그 모든 일은 형식에 불과했다고, 그는 왕이며 자신은 사제에 불과하다, 잊어야 한다고 수없이 자신을 달래 왔어도 그 사랑의 열정은 도무지 꺼질 줄 모르는 향로불과도 같이 한사코 타오르기만 했다.

'신성한 결혼식'은 매년 정월초하루에 행해졌다. 이 결혼식은 그 어떤 행사보다 중요했으며 왕이 치러야 할 가장 신성하고도 한 특별한 의무였다. 때문에 왕은 해마다 이난나 여신과 결혼식을 올렸고, 그 예식을 통해서 여신은 비옥한 대지와 가축의 생산력과 백성들의 풍요와 안정까지도 신랑이 된 왕에게 주는 것이었다.

닌후는 그때 여신 이난나의 대행자로 뽑힌 것이었다. 그 많은 여사제들 중에서 자기가 선택되었을 때 닌후는 얼마나 영광이던지 며칠간이나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 '왕에게 바치는 시'를 가장 아름답게 써서 외우고 또 외웠다.

혼례식 전, 그 이른 아침엔 미용사들이 와서 얼굴과 머리를 치장해주었다. 미용사들은 그녀의 긴 머리를 양상추처럼 우아하게 틀어 올린 뒤 먼 나라에서 수입한 비단 너울까지 씌워주었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예식장으로 걸어나갈 때는 어떻게나 다리가 떨리던지 그만 주저앉을 것 같았고, 그때 집전자 사제장이 주의를 주기도 했다.

닌후의 입에서 나직한 가락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왕에게 바쳤던 시였다.

여왕은 고결한 그를 낳았고
여왕은 고결한 그를 낳았고…

내가 노래를 불렀기에 왕은 나에게 금반지 은반지를 주었고
청금석 목걸이를 주었고
왕이시여, 당신의 선물은 나의 보석함에 가득 넘치고
왕이시여, 나를 어여삐 여기신 이비 신이시여
엔릴의 사랑을 받는 이 땅의 신이시여…

닌후는 가만히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거기에는 왕이 선물로 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홍옥과 청금석을 번갈아 엮은 것으로 신전 최고의 장인이 세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보석 알들을 꼭 쥐었다. 양쪽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그날 왕의 입김이 거기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듯하자 그녀는 얼른 사랑가를 되새겼다.

신랑이여, 내 가슴 속의 사랑하는 이여,
신랑이여, 내 가슴 속의 사랑하는 이여,
꿀같이 달콤한 그대의 아름다움이여,
사자여, 내 가슴 속의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떨면서 당신 앞에 서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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