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개개종교의 역사와 교의를 살피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전혀 다른 범주를 설정하고 종교를 접근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하나의 '개안(開眼)'이었다. 또한 그의 '학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철저한 되물음을 하게 하였다. 무식하다든지 의식이 없다든지 하는 비판을 무릅쓰고 나도 나 자신의 물음에 정직하고 싶었다. 엘리아데는 나의 그러한 물음에 끊임없는 메아리를 쳐 주었다. 나는 그러한 나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자. 다음 중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을까.
①'종교적'인 시대 ②'종교'의 시대 ③'종교들'의 시대 ④'종교적인 것'의 시대
제시된 보기들의 작은 문구 차이를 예민하게 살펴보고 싶은 분이라면, '정답'을 찾기보다는 어떤 맥락에서 이러한 보기들이 나열되었는지가 더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정진홍의 신간 'M. 엘리아데-종교와 신화'(살림. 2003)(이하 <엘리아데>)를 펼쳐보길 권한다.
100쪽이 되지 않는 작은 책인 정진홍의 <엘리아데>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진지한 물음들이 담겨 있다.
"종교를 다시 묻는다는 건 무엇인가. 또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인은 어떠한 실존적 정황에 있으며, 어째서 끊임없이 구원을 희구하나. 상상력의 지평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이란. 영성이란."
정진홍은 끊임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한 물음들로 인해 어쩌면 "자기 자신의 존재뿌리가 송두리째 뽑힐 지도 모르지만" 정진홍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또는 설명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삶이 있다고 한다.
그 독특한 삶을 살았던 정진홍은 "자신의 경우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바로 엘리아데(1907-1986)와의 만남"이었다고 소회한다. 특정 종교의 자기 주장이 아닌 전혀 새로운 언어로 종교와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정진홍에 있어서 하나의 눈떠짐, 개안(開眼)의 경험이었다고 한다.
"저리도록 내 물음에 정직하고 싶다"
입담 좋은 몇몇 동료들과 후배들은 이러한 정진홍과 엘리아데와의 만남을 '세기적 만남'이었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정작 정진홍은 엘리아데와의 만남이 지극히 소박한 욕심, 즉 "내 물음에 저리도록 정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진홍이 가졌던 그 절실함을 단 몇 권의 책을 통해 온전히 공유하기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지만, 어떠한 계기에서 그의 절박한 물음이 비롯되었는지는 조심스레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정진홍의 <엘리아데>에서 우리가 처음 접하는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무척 생소하다. 정진홍은 "엘리아데는 왜 종교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을까?"라고 되묻고 있다.
종교를 연구한다는 학자가 왜 정작 '종교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을까. 정진홍은 "이러한 식의 물음은 결국 이미 자신이 내장하고 있던 어떤 해답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고자 하는 장치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종교란 무엇인가. 하느님을 믿는 게 종교다. 왜 하느님을 믿는 게 종교이냐. 종교란 하느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어반복이란 자신의 종교적 봉헌이나 돈독한 신심을 드러내는 것일 수는 있어도, 실은 지극히 자폐적(自閉的)이며, '게으르고 자의적(恣意的)이고 편리한 인식'만을 지양하려는 태도를 드러내는 부정직한 모습이라는 게 정진홍의 지적이다.
이러한 계기에서 우리는 '정진홍의 학문함'이 시작된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로부터 전개되는 다양하고 진지한 물음들이 펼쳐지는 일련의 흐름도 느낄 수 있다.
정진홍의 <엘리아데>는 서구의 한 종교학자에 대한 무미건조한 소개글이 아니다. 엘리아데와 만나 겪어 지니게 된 '경험'을 서술하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기억'을 되살펴 보는 정진홍의 오랜 지적 성찰의 과정이 담긴 책이다.
정진홍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자신의 물음에 메아리 쳐주었던 엘리아데와의 만남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울림을 낳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