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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프린터 회사를 운영한다고 합시다. 100달러와 150달러 짜리 2종의 제품을 만들어 팔고 있는데 불황 탓에 수익성이 좋은 150달러 짜리는 파리만 날리고 마진이 낮은 100달러 짜리만 팔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해 볼까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200달러짜리를 하나 더 개발해 진열대에 같이 올려놓는 겁니다.

소비자들은 200달러짜리 사자니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100달러짜리는 싸구려 같아 기분이 찜찜해 150달러 짜리로 몰리게 됩니다. 이 경우 200달러 짜리 프린터는 팔려도 그만 안 팔려도 그만이고 정작 의도는 수익성이 가장 좋은 150달러 짜리 프린터를 팔기 위해 고안된 꽃놀이 패지요.

여자 친구와 오랜 만에 근사한 식당에 데이트를 하러 갔습니다. 제일 싼 와인이 만 원인데 가격표를 살펴 보니 10만 원이 넘는 비싼 와인도 즐비합니다. 싼 것을 사자니 너무 속 보이는 것 같고 그렇다고 과하게 돈을 쓰는 것도 부담스러워 결국 2~3만 원 정도 하는 와인을 선택합니다.

이 경우 10만원이 넘는 비싼 와인들은 팔려도 그만 안 팔려도 그만이고 사실은 이 식당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2~3만 원대 와인을 많이 팔리게 하려는 전략적 선택 탓에 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판촉기법을 골디락스 가격(Goldilocks Pricing)이라고 부릅니다.

극단적 선택을 피하고 평균값에 가까운 대안으로 몰리는 사람의 본능을 이용한 판촉기법입니다. 자연현상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사람의 신장 분포가 평균 키를 중심으로 가장 많이 몰려 있고 양 극단으로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든다거나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가 준중형차라든가 하는 것이 이런 증거인데 통계적으로 정규분포곡선이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그간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시장의 정규분포가 최근 들어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냉장고나 TV는 최근 들어 아주 대형제품 아니면 독신자들이 애용하는 소형제품만 불티나게 팔리고 어중간 한 사이즈 제품은 아예 퇴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면서 휴대형 개인용 제품은 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는 반면에 집안에서 사용되는 가전제품들은 극단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중간은 없어지고 극단만 남는 추세입니다.

▲ 정규분포곡선
ⓒ 민경진
최근 미국 마케팅계의 화두는 로켓팅(Rocketing)이란 현상입니다. 고급 자동차, 홈 시어터 장비, 해외 여행 등 큰 예산이 들어가는 고가의 제품과 서비스에만 소비가 몰리고 여타 사소한 것 들에는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소비행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역시 사람들의 관심사가 중간치에서 벗어나 정규분포 곡선의 좌우 극단으로 양극화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번 주 타임(Time)지의 커버 스토리는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 양극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선거를 치를 경우 지지하겠다는 유권자가 47%인 반면 반대표는 48%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지난 2000년 대선의 지지율 양극화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어 새삼 놀라게 됩니다.

고어와 부시로 나누어 대립한 지난 미 대선에서 정치분석가들은 그 간 미국 유권자의 상당수는 정치 성향 상 중도파, 즉 부시가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ve)"라는 슬로건으로 사로잡고자 했던 정규 분포 곡선의 가운데 부분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어와 부시로 나누어 대립한 지난 2000년 미 대선에서 정치 분석가들은 이들 중도파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양 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고 우려한 바 있습니다.

내년 미 대선에서도 이러한 추세가 더욱 두드러져 미국 국민 전체가 공화당과 민주당 양 진영으로 나뉘어 매우 날카로운 한 판 대결을 벌일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후보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상대방 후보를 증오하기 때문에 투표장으로 향하는 현상이 4년 만에 또 다시 재현될 것이라는 예측이지요. 자기 진영 후보의 정책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상대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투표장에 나간 것은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 국민이 첨예하게 양 진영으로 나뉘어 중도파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 지난 대선의 특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피하고 될 수 있으면 평균치의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경향이 강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왜 이런 양극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일까요? 경제력에 있어서도 연봉 수억이 넘는 고액 소득자가 넘쳐나는 한편에 중산층은 갈수록 엷어지고 하층계급은 갈수록 두터워 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개성이 강해지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면 이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고수하더라도 경원시 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된 사회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대중매체의 몰락과 인터넷과 같은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매체의 급격한 부상을 지목할 수 있습니다.

최근 방송 3사를 가릴 것 없이 간판 프로그램인 9시 뉴스의 시청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 노심초사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만 해도 9시면 가족들이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뉴스를 시청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도란도란 나누곤 했던 것에 비하면 요즘 가정의 모습은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VOD와 인터넷 뉴스의 급격한 보급으로 젊은이들은 굳이 그 시간에 TV 앞에 앉아 있을 생각을 하지 않고 중년 이상의 시청자들만 여전히 TV매체를 고수하고 있을 뿐입니다.

TV채널은 유선방송과 위성방송의 가세로 수백 개로 늘었고 각자 취향에 맞추어 선택할 수 있는 매체의 시·공간적 폭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가족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화제를 삼을 만한 '매체 체험'의 기회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체험의 영역이 급속하게 파편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 폐인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공전의 인기를 누린 드라마 <다모>의 경우도 20~30대를 중심으로 열혈 시청자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누렸을 뿐 세대와 지역을 초월한 광범한 시청률를 기록하지 못 했습니다.

언젠가 저의 칼럼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신책불이(身冊不二: You are what you read)입니다. 한 사람이 자주 접하는 매체와 그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를 수가 없습니다. 지난 해 대선이 20~30대와 50~60대를 중심으로 상반되는 지지성향을 보인 것 역시 두 세대가 각자 접하는 매체가 인터넷과 신문·방송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던 셈입니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모든 것이 개인화되어 문화와 의식이 파편화된 시대에 TV나 신문은 마치 벽지(Wallpaper)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없으면 허전하지만 있어도 굳이 의식하게 되지는 않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매체가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인터넷 최강국 한국이 극단적으로 파편화되고 있는 매체환경 속에서도 사회적 공론의 장을 만들어 갈 수 있을 지 주목되는 시점입니다. 종 모양의 정규분포 곡선이 좌우에 걸쳐 평탄한 모습까지는 유지하지 못 해도 최소한 오목한 형국까지 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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