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어느 일요일 나와 내 아내는 친환경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군자대로 어린이대공원 후문 쪽 길가에 보니 왠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수십 명이나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조폭들의 행사인가? 아니면 장례식장인가? 눈을 들어 보니 그것은 조폭들의 행사장도 장례식장도 아닌 결혼식장이었다.
서양식 상복이며, 조폭들이 즐겨 입는 검정 양복이 난무하고 있으니 착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 뒤 얼마 있다가 우리는 잘 아는 사람들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식 혼례복을 만들어준 사람들이었다. 남의 나라 풍속인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는 대신 우리의 한복을 입고 결혼식을 한다면 자주적인 의미는 물론 싼값에 치를 수 있으며, 결혼식 뒤에도 언제든지 다시 입을 수 있어 경제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며칠 전의 그런 일을 또 보게 된다. 역시 남자 하객들의 대부분은 검정 양복 일색이다. 하루 전날 한 장례식장에 아는 사람에게 문상을 갔었는데 그곳에서도 검정 양복들, 이곳 결혼식장도 검정 양복들이다. 심지어 신랑, 신부의 아버지들도 검정 양복이다. 검정 양복은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통용되는 공통의 예복인가? 나와 아내는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여성들은 다행이다. 많은 수가 유채색 계통의 옷들을 입었다. 게다가 일부지만 몇몇 사람이 전통 한복과 생활 한복을 입어 자리를 빛내주었다.(한복이 자리를 빛낸다는 생각은 생활 한복 사업을 하는 나의 '자기 논에 물대기'(아전인수)일까?)
한복의 특징을 잃어버려 국적불명의 옷이 되거나 소매가 짧아 품위가 떨어진 것도 있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쁜 날 우리의 한복을 입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가상한가? 북한의 여성들은 아직도 기쁜 날이나 행사 때에 모두가 한복을 입으며, 일본 여성들도 많이 불편한 자기들 고유의 기모노를 입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는데 우리는 벌써 우리의 자존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신랑이 우리가 해준 혼례복 중 두루마기를 입지 않은 채 돌아다닌다. 남자 전통 한복은 밖을 나가면 무조건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예의인데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신랑을 부른다.
"아니, 왜 두루마기를 입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예쁜 저고리와 조끼가 감춰진다며 두루마기는 입지 말라고 하는데요."
"큰일 날 소리. 두루마기는 예의입니다. 절대 입어야 해요. 그리고 두루마기는 한복의 종류 가운데서 품위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옷입니다."
한복을 입겠다는 사람들도 한복의 기초적인 예의를 모른다. 텔레비전을 보면 남자 출연자가 두루마기를 입지 않은 채 나오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데 정말 품위가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기야 그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니고 사철깨끼를 만들고 대님을 생략하거나 서양옷처럼 진동(팔소매와 몸판을 붙이는 바느질선)을 판 잘못된 한복을 쉽게 만들어주는 한복인들도 물론 책임추궁을 당해야 한다.
어쨌든 신랑, 신부는 우리식 혼례복을 입고, 무난히 결혼식을 마친 다음 나란히 팔짱을 끼고 퇴장을 한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여기저기서 멋있고, 예쁘다는 말들이 들린다. 혼례복을 만들어 준 우리는 그저 기쁜 마음이다.
혼례복을 바느질하는 아주머니는 옷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지닌 분이다.
"한번은 조카가 떨어진 청바지를 입고 왔어요. 꿰매준다고 당장 벗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일부러 옷을 구멍내고 다닌단 말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들을 보면 IMF가 온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요. 칙칙한 무채색의 옷들을 입고 다니니까 나라도 어두워질 수밖에요. 국민들이 밝은 옷을 입어야 나라가 밝아집니다."
지극히 옳은, 당연한 철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자 말씀이 40세 이후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는데 늘 험한 생각을 하면 얼굴에 그 험한 기운이 서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밝은 옷을 입고, 밝은 생각을 하게 되면 하는 일들도 더욱 밝아지지 않을까? 긍정적인 생각이 옷에서도 표현되는 것이다.
혹시 조폭들이 즐겨 입는 검정 양복을 당연히 입는 정치인들은 마음도 조폭을 닮아가고 있음인가? 그래서 정치판이 온통 검정물이 튀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지나칠까? 한 달에 단 한번이라도 대통령이, 국회의장이 밝고 품위있는 두루마기를 입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나라를 밝은 모습으로 이끌어 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그저 기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어둠 속에서 사는 것보다 환한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갔으면 한다. 제발 이제 한복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밝은 색의 옷을 입어 환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순한 바람만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길 간절히 바란다. 조폭들과 정치인들이 즐겨 입는 검정 양복이여! 이제 우리에게서, 한국에서 멀리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