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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단식'을 해보지 못했다. 주변에서 어쩌다 기(氣)수련 등 건강과 관련하여 일주일이나 열흘씩 단식을 한 사람을 만나면 괜히 기가 죽곤 했던 경험만 있다.

종교적 성격의 단식을 한 이들을 만난 적도 있다. 명상 수련 속에서 보름 동안 단식을 한 신부님들을 뵌 적도 있고, 스님에게서 단식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 분들에게서 단식 이야기를 들을 때는 존경심과 부러움 따위를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단식은 일단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비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단식이 사람의 정신을 얼마나 맑게 하고 몸의 건강에도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단식 경험자들의 말을 깊이 수긍하고 신뢰하는 편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으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단식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식 경험은 없지만 하루에 한 끼씩 굶어본 적은 많다. 천주교 신자인 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순절 동안에는 최소한 이틀, 두 끼는 굶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조금이나마 동참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굶어서 절약된 것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돌려주기 위함도 있다.

그런데 나는 46일에 이르는 사순 시기 내내 아침을 굶은 적이 많다. 당뇨 관리를 하기 전에는 거의 해마다 46일 동안 매일 한 끼씩 금식을 하곤 했다. 더러 시장기를 느끼기는 했지만 별로 어렵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대 시절을 제외하면 몹시 배고팠던 기억이 내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옛날 소년 시절 '안남미'를 배급 타다가 먹은 때도 있지만, 우리만 해도 아버지, 어머니가 어렸을 때처럼 굶주리며 살지는 않았으니 시대를 잘 타고난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대 시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훈련병 시절과 월남에서 돌아와 전방의 2선 기지에 있을 때는 노상 시장기를 안고 생활했다. 상급 부대에서 검열관이 올 때는 밥그릇 위로 담뿍 올랐던 밥이 다시 폭삭 줄어든 것을 보고 군대 안에도 도둑놈들이 많다는 사실을 체감하기도 했다.

아무튼 배고픈 줄 모르고 사는 이 시절에는 단식이라는 것이 조금은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욱이 기 수련이니, 명상 수련이니 하는 말들이 단식이라는 단어에 결부되면 그것은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식이라는 단어에 '투쟁'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단식투쟁'은 일단 비장한 의미를 갖는다. 처절한 기운도 발산한다. 음식을 거부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는 뜻이니 보통 결심 가지고는 행할 수도 없으려니와, 어떤 면에서는 경건함마저 묻어 난다.

몸과 마음의 기를 새롭게 하기 위한 단식이 아니고,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우기 위한 단식이니, 단식투쟁은 정말로 비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약자(弱者)가 막다른 길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투쟁 방법인 데다가 사람의 귀중한 목숨이 달린 일이므로, 참으로 무거운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 비장함만큼 어느 정도는 희소가치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여기저기에서 걸핏하면 단식을 한다. 우리는 마치 유행병처럼 단식투쟁이 너무도 흔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무게와 함량을 지니지 못한 단식투쟁,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단식투쟁도 심심찮게 일어나서 단식투쟁의 비장한 본령을 오히려 의심하게 되는 것도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비장함을 훼손당한 단식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2001년 여름을 달구었던 한나라당 박종웅 국회의원의 단식투쟁을 들 수 있다. 그는 당시 정부의 언론개혁 의지에 맞서 '언론탄압'에 항거한다는 명분으로 20일 넘게 단식투쟁을 벌였다.

투쟁 방식의 특이성으로 인해 일단 대중의 관심이 집중, 증폭되는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당시 박 의원의 단식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치한 코미디로 비쳤다. 그를 돈 키오테로 비유하는 글도 있었고, 남다른 이상(理想)의 소유자였던 돈 키오테에 박종웅을 비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도 있었다.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이 2년 전에 연출했던 해프닝성 단식투쟁이 이번에는 한나라당의 대표에 의해 재연되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아무리 보고 다시 보아도 나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단식에서 단식투쟁의 무게와 함량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식투쟁의 비장한 본령을 훼손한 기이한 모습으로만 보인다.

2001년 박종웅 의원이 감행한 '언론탄압 항의' 단식과 2003년 최병렬 대표가 벌이는 '특검거부 항의' 단식의 성격이나 수준이 매우 유사함을 읽지 않을 수 없다. 2년이나 지났는데도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음을 느낄 수 있다. 한 나라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 때깔 좋고 빛깔 좋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2년 전과 똑같이 오종종한 현실에서 비애를 느낀다.

2년 전과 똑같다는 것은 10여 년 전 5공 시절, 20여 년 전 유신시절과도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똑같다는 것은, 그들이 권력의 주구로서 온갖 영화를 누렸던 그 시절을 오늘도 하염없이 그리워한다는 것이고, 이 시대를 그 시절로 되돌리려는 망상에 젖어 있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단식은 우리나라 정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궤변과 억지와 생떼가 조각조각 겹겹이 달라붙은 살벌한 갑옷들의 조악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구국의 결단'을 강변하며 그럴 듯한 논리로 말을 포장한다 하더라도, 정파의 이익을 위한 싸움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나는 심각한 성인병들을 안고 사는 고로 단식은 감히 엄두도 못 내고, 거의 매일 저녁 지압을 받으며 산다. 다행히 가운데 동생이 실력이 좋아 하루종일 일터에서 작업을 한 피곤한 몸으로도 저녁에는 내 집에 와서 어머니와 내게 지압을 해주곤 한다.

어제는 지압을 마친 후 어묵을 끓여 막걸리를 마셨는데, TV에서는 9시 뉴스를 방영하고 있었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 일용직 근로자로 생활하고 있는 동생은 혀를 찼다. 배울 만큼 배우고, 일등 신문사의 편집국장에다가 장관까지 지냈다는 사람이 저렇게 사리분별을 못하느냐고 했다. 최병렬 대표의 단식에 대해 '역사의 조롱거리'가 될 일이라고 동생은 단정했다.

같이 어묵을 먹던 중학교 1년 아들이 최 대표의 단식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특검이니 거부권이니 하는 것들을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 검찰의 위상과 기능, 과거의 검찰과 오늘의 바람직한 검찰상, 특검의 생성 이유와 권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거부권, 국회의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결의 배경,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배경 등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아빠의 설명을 진지하게 다 듣고 난 아들녀석은 말했다. "아니, 국회의 특검 결의를 대통령이 거부했다는 그 한가지 이유로 거대 야당 대표가 단식을 해요?" 실로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고작 그까짓 일에 격에 맞지 않게 단식이라는 '목숨 칼'을 빼들었느냐는 뜻이니? 이제 단식은 흔해빠진 장난 같은 일이어서 결코 투쟁이 못돼."

이런 아빠의 말에 아들녀석은 이번에는 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 사람이 죽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야당 대표의 단식이 어딘가 모르게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했음인지 최병렬 대표는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좀더 험악한 말로 이유를 댔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모든 국민이 노무현 정권은 실패한 정권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벌써부터 대통령의 하야까지 거론하는 그들이니 못할 말이 없겠지만, 제발 그런 거칠고 험악한 강변에 국민들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이고, 아전인수 맛으로 사는 게 인생이라지만, 국민 괴로운 것은 알아야 한다. '모든 국민'하는 식으로 국민 끌어들이는 버릇은 정말로 고약하다.

그런 말버릇부터 고치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판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지름길일 수 있다. 이제는 국민을 어려워할 줄도 알아야 하는 시대다. 단식이니 장외투쟁이니 하는 희화적인 풍경을 연출하기에 앞서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기울이는 겸손한 자세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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