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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렇다. 분명 바다 속 풍경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물고기는 대파, 굴딱지는 버섯 그리고 산호초는 상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온갖 채소들로 바다 속 풍경을 꾸며 놓은 이곳은 사실은 <바다 속 채소밭(Vegies Down Under)>이라는 제목의 정원인 것이다.

이 정원은 지난 11월 26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오클랜드 리저날 보타닉 가든(Auckland Regional Botanic Gardens)에서 펼쳐진 엘레슬리 플라워 쇼(Ellerslie Flower Show)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함께 관람객들이 투표로 뽑는 최고 인기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그러니 그렇게 사람이 많을 수밖에….

클래식에서 아방가르드까지, 정원은 예술이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정원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정원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는 뉴질랜드에서 엘레슬리 플라워 쇼는 매년 새롭고, 다양한 정원 디자인을 선보이는 시험장이다. 내로라 하는 정원 및 조경 디자이너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원들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년 가장 크고 화려한 정원을 선보여 주목을 받고 있는 에이에스비 디스커버리 관(ASB Discovery Marquee)에 올해 전시된 <꿈의 정원(Dream Garden)>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정원은 18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콜러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시 ‘쿠빌라이 칸’에 나오는 꿈의 정원 제나두(Xanadu)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 정철용
모두 6개의 정원으로 나누어져 있고, 여기에 심은 꽃과 나무들만도 모두 만 그루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여서 <꿈의 정원>을 한 번 둘러보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정원을 디자인한 조경 디자이너 팀 페더(Tim Feather)는 <뉴질랜드 가드너> 11월호에서 자신에게 있어 예술, 특히 시가 미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번 <꿈의 정원> 역시 그러한 예술적 영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시는 현대적인 정원을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서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는 환상적인 이미지의 창조나 조경 작업에 있어 시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지요.”

ⓒ 정철용
<꿈의 정원>이 시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인 반면, 마이클 힐 주얼러 관(The Michael Hill Jeweller Grand Marquee)에 전시된 공룡 스모그(Smaug)는 JRR 톨킨의 판타지 소설 <호빗>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무수히 많은 이끼와 동백나무 잎들을 일일이 손으로 붙여서 만든 이 공룡은 잎에서 연기를 내뿜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따라 나선 어린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떠오르는 신예 디자이너들을 위한 전시관인 메르세데스 벤츠 디자인 관(Mercedes-Benz Design Marquee)에 들어서면 예술과 정원의 관계는 이제 역전된다. 올해의 주제로 “정원은 하나의 예술 형식이다(The Garden is an Art Form)”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 전시관에서는 예술이 전면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보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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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54>라고 이름 붙인 정원은 그 중의 하나인데, 뉴질랜드의 뒷마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디와 레몬과 고사리나무 같은 식물들과 함석판과 철근과 빨래집게 같은 광물성 물체들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함석판과 시멘트벽에서 자라나는 잔디와 마치 공처럼 벽에 붙어 있는 레몬은 <넘버 54>가 실제적인 효용성을 지닌 정원이 아니라 심미적인 가치가 더 앞서는 예술작품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예술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꽃꽂이일 것이다. 트위닝즈 플로랄 아트 및 디자인 관(The Twinings Floral Art & Design Marquee)에서 우리는 이제 온전히 예술작품으로만 존재하는 꽃들을 만난다.

ⓒ 정철용
이곳에서는 한국의 꽃꽂이와는 달리 매우 크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태평양의 꿈(Pacific Dreams)”이라는 주제로 열린 올해 전시에도 망사와 나무 조각품, 철제 기둥, 피륙 등 다양한 재료가 동원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놀이터에서 바베큐까지, 정원은 오락이다

뉴질랜드의 정원은 또한 세 살짜리 아이에서부터 70살 먹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엔터테인먼트, 즉 오락의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엘레슬리 플라워 쇼에서는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많은 볼거리가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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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저만 알던 거인>에 나오는 정원처럼 예쁘게 꾸며 놓은 정원이 어린이들의 눈을 사로잡는다면 포인세티아와 크리스마스 트리로 화려하게 장식한 <키위 크리스마스> 정원은 주로 노인들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그런가 하면 정원 구경하기 지친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있기도 하고, 예전에 살던 시골집 주변의 들판을 추억하게 만드는 온갖 화려한 색상의 야생화 꽃밭도 있다.

5.5 ha(약 1만 7천평)에 달하는 행사장 곳곳에 마련된 정원들을 구경하러 다니다가 지치면 호숫가 옆 잔디밭에서 앉아 카푸치노나 와인을 곁들여 바비큐를 즐길 수도 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호수 건너편 하늘 위로 집중된다.

ⓒ 정철용
분장한 남녀 4명이 긴 철제 기둥 위로 올라가서 그 꼭대기에 매달려 흔들거리면서 공연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이라는 이 공연단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팀이라고 하는데 4-5m 높이 위에서 펼치는 그들의 공연은 올해 엘레슬리 플라워 쇼가 준비한 매우 색다른 메뉴이다.

하지만 공중에서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며 묘기를 펼치는 그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바람에 꽃대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서 꽃과 정원의 축제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정원 전시 구경도 다 끝나고 공연도 이제 끝났지만 그걸로 볼거리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호숫가 주변에 전시된 야외 조각품들과 행사장 곳곳에 들어서 있는 가게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 정철용
뉴질랜드에서는 꽃과 나무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식품과 조각품 등 인공물을 이용해서 정원을 화려하고 다채로운 표정으로 꾸미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야외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다.

흔들거리는 길고 가느다란 쇠막대기 위에 돌멩이들을 두세 개씩 꿰어 만든 조각품도 있고 예리하고 차가운 느낌의 금속을 이용하여 냉혈동물 공룡의 공격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조각품들도 눈에 띈다.

ⓒ 정철용
아이들과 남자 어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 공룡 앞에서 쪼그려 앉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마치 날카로운 발톱에 몸이 찔리기라도 한 듯 진저리를 친다. 그렇게 진저리를 치는 몸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것이 있다. 벤치 위에 다리를 끼고 나란히 서 있는 허수아비 세 사람.

한국의 허수아비가 논밭에서 새들의 접근을 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 반면 이곳의 허수아비는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하나의 장식품이다. 그래서 얼굴이 활짝 웃는 상이다. 허수아비 말고도 정원의 꽃밭에 놓을 여러 가지 장식품들이 진열된 가게들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정철용
올해 엘레슬리 플라워 쇼는 행사 초반 3일 동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몹시 부는 궂은 날씨가 계속되어서 관람객 수가 예년에 비해 저조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행사를 모두 마치고 주최 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예년처럼 7만명이 넘는 인파가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이것은 주최 측 대표인 캐쓰 핸들리(Cath Handley)가 <뉴질랜드 헤럴드>지에 밝혔듯이 “올해에는 다양성 특히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다양한 노력과 20~30대를 위한 도시적 특성에 집중한” 결과로 보여 진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엘레슬리 플라워 쇼는 정원 일을 좋아하는 일부 나이든 사람들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정원 일에 대한 관심도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와서 즐길 수 있는 행사를 지향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 편으로는 예술성을, 또 한 편으로는 오락성이라는 어쩌면 상호 이율배반적인 요구를 어떻게 잘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올해로 9회째를 맞는 엘레슬리 플라워 쇼는 하나의 시험대였고 여기에 대한 반응은 좋아 보인다. 행사가 끝난 지 이틀 밖에 안 되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벌써 내년 10회째 행사를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엘레슬리 플라워 쇼의 역사

매년 11월말에 주말을 끼고 5일 동안 펼쳐지는 엘레슬리 플라워 쇼는 1994년 오클랜드의 엘레슬리 경마장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지역 자선 단체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안정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이벤트를 연구 중이던 오클랜드 로타리 클럽은 영국에서 열리는 첼시 플라워 쇼를 모델로 삼아 이 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로타리 클럽 자원봉사자들은 입장권 판매, 쓰레기 처리, 교통 안내, 주차 안내 등 행사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엘레슬리 플라워 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행사로 성장했다.

1997년 한 해를 건너뛰고 1998년에 지금의 오클랜드 리저날 보타닉 가든으로 행사장을 옮기면서부터는 더욱 안정적이고 유리해진 입지 요건과 그 동안의 행사 운영 노우하우가 쌓여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지는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행사에 참가하는 각 정원들을 평가하여 시상하는 심사위원단도 매년 세계 각국에서 초빙된 세계적인 조경 및 정원 디자이너들로 구성되어 행사의 공신력을 더하고 있다. 또한 행사에 참여하는 팀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 수준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시상도 더욱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올해에는 19개의 금메달과 28개의 은메달 그리고 36개의 동메달 등 총 83개의 메달이 수여되었으며 심사위원 대상(The Judges Supreme Award)과 최우수 디자인상 및 최우수 원예상이 새로 도입되었다. 엘레슬리 플라워 쇼의 전시관의 이름은 대규모 협찬을 해준 스폰서의 이름을 따서 붙여지고 있다. / 정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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