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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청간정과 천학정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청간정과 천학정 ⓒ 이종원
천학정

청간정에서 고성쪽으로 5분정도 차로 달리면 백도해수욕장이 나온다. 그 초입에 천학정이 자리잡고 있다. 천학정은 계단을 올라 절벽에 아스라히 걸쳐져 있다. 백도해수욕장과 죽도 그리고 능파대가 아스라히 보인다. 1931년 이 고장 유지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해변으로 가면 조용한 어촌마을을 만날 수 있다. 방파제에 앉아 바다 바람을 맞는 것도 좋다.

고택 전경
고택 전경 ⓒ 이종원
어명기 전통가옥

7번국도에서 좁은 산길로 1.3km 정도 들어가면 어명기 가옥이 나온다. 차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면 놀랄 것이다. 고성 산불이 이렇게 바리깡으로 머리를 민 것처럼 황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어명기 고택 입구의 소나무는 살아 남아 이렇게 이방인을 환영하고 있다. 만약 이 소나무 마저 없었다면 그냥 되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고 있는 돌담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고 있는 돌담 ⓒ 이종원
어명기 가옥에서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돌담을 선택할 것이다. 흙벽에 큼직한 돌을 박아 넣고 그 위에 정결한 기와를 얹었다. 지형에 맞게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위아래를 넘나들고 있다. 그러한 곡선미가 참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런 시골에 이렇게 큰 집이 있었다니 의아스러울 정도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태극기가 걸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선생님. 집 구경 하러 왔습니다."

어명기 선생님이다. 서울에 거의 살다가 가끔 이 곳에 내려와 며칠 머물렀다가 다시 훌쩍 서울로 올라가신다고 한다. 선생님이 계실 때 이 집을 찾은 것은 분명 행운이다. 직접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이 집의 내력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방 천장과 지붕 밑면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방 천장과 지붕 밑면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 이종원
안채로 들어가 보았다. 각 방마다 문이 두 개씩이다. 방의 천장 위와 지붕 밑면 사이는 막지 않고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내부의 온기가 서로 통할 수 있게 해주고 지붕으로부터 내려오는 한기를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사모님이 점심 준비를 하고 있길래 부엌에 들어가 보았다. 부엌이 어찌나 넓은지, 정말 운동장만 했다.

"사모님. 왜 이렇게 부엌이 커요?"

"옛날 눈이 많이 올 때면 마루까지 눈이 쌓이거든요. 그럼 집에 며칠이고 갇혀 있을 겁니다. 그래서 부엌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부엌의 곳간과 쌀독
부엌의 곳간과 쌀독 ⓒ 이종원
부엌 한편에 곳간채가 보인다. 아래는 외양간이고 위는 곳간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곳간문을 열어보았다. 어른 크기 만한 쌀독이 무려 7개가 놓여 잇다. 쌀 5가마가 들어간다고 하니 이 집이 얼마나 부유한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질박한 독만 봐도 흐믓하다.

내부의 연기구멍과 바깥의 함각부분
내부의 연기구멍과 바깥의 함각부분 ⓒ 이종원
지붕의 합각부에는 구멍이 몇 개 뚫려 있다. 내부의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게 하기 위함이다. 바깥에서 보면 예쁘게 다듬어 놓인 연기구멍을 볼 수 있다.

바깥으로 나갔다. 서쪽면에는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창을 내지 않았다. 바람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어명기 가옥은 양반가옥에서 보기 힘든 ㄱ자형 겹집구조란다. 방, 마루, 부엌, 외양간 등이 한데 붙어 있어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있다. 함경도, 강원도 북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란다. 부엌 뒤에 떨어져 있는 곳간채도 들러 보았다. 반은 쌀독을 저장했던 곳이고, 반은 방으로 꾸며져 있다.

어명기 가옥은 1500년대 처음 지었으나 1750년 화재로 없어졌고 3년 뒤 다시 지어졌다고 하니 무려 250여년 된 집이다. 그러나 그 연륜만큼이나 사연도 많다. 할아버지 어용수씨가 1860년 농토 3000평으로 이 가옥을 매입하여 대대로 팔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3.8선이 그어지고 이 곳은 북한 땅이 된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집이 몰수되면서 인민위원회의 사무실로 쓰게 되었다. 주인 어명기씨는 조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인민군에 쫒겨 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선친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군에 입대하면서 복수의 칼을 간다. 결국 6.25가 터지면서 그는 국군이 되어 고성지역을 누비며 인민군과 싸웠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그의 집 앞에 다시 선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국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결국 휴전이 되고 나서야 집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택의 주인인 어명기씨
고택의 주인인 어명기씨 ⓒ 이종원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되찾은 집이기에 이 집에 대한 애착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고택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게 화려한 정원을 가꾸었으며 비싼 대리석으로 안내판을 만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란다.

"아들은 미국에 가 있으니,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낙은 가끔 이 집을 찾아 가꾸는 것이지요."

산불의 흔적
산불의 흔적 ⓒ 이종원
한동안 평화로웠던 어명기 가옥이 또 한번의 시련을 맞게된다. 바로 1996년 발생한 고성산불이다. 화마는 생각 외로 무서웠다. 주변의 나무를 다 태우고 담벼락을 무너뜨린 뒤 툇마루까지 올라온 것이다. 마루에 남아있는 불에 그을린 흔적을 어루만지니 목이 메인다.

대청마루에 서서 앞산을 보면 골프장을 펼쳐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산불 때문에 큰 나무가 다 타 버리고 잔목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택옆엔 감나무만이 외롭게 서 있다. 상상하기도 싫은 전쟁을 목격했고 무서운 산불도 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어명기 가옥은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우직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택을 사랑한다. 비록 지난날보다 더 큰 시련이 앞을 가로 막더라도 고택은 오래 오래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ㄱ'자 겹집과 장작더미
'ㄱ'자 겹집과 장작더미 ⓒ 이종원
왕곡마을

우리나라 전통가옥 1호는 바로 왕곡마을이다. 1988년 전통건조물 보존지구 1호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14세기경 강릉 함씨, 강릉 최씨가 용궁 김씨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며 19세기 전후하여 건립된 북방식 한옥 21동이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밀집 보존되고 있다. 이 곳 마을엔 우물이 없는 것이 큰 특징이다. 마을 형태가 배모양처럼 생겨서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란다.

배달의 기수에 자주 나왔던 방앗간
배달의 기수에 자주 나왔던 방앗간 ⓒ 이종원
여행정보

1) 청간정 가는길
속초에서 7번국도를 타고 간성쪽으로 10 km 떨어져 있다.

2) 어명기 가옥 가는길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에 있다.속초에서 7번국도를 타고 가면 오른쪽에 코레스코 콘도가 있다. 그걸 지나자마자 마을이 나온다. 지하도를 가로질러 시멘트길로 1.3m 가면 어명기 가옥이 나온다. 도로에 푯말이 있다.

3) 왕곡마을 가는길
속초에서 간성쪽으로 7번국도를 타고 가면 공현지교가 나온다. 왼쪽이 오봉버스정류장이다. 이길에서 1.3km 들어가야 한다.
아담한 산 밑에 옹기종기 한옥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마다 불을 땐 연기가 하늘을 수놓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관통하고 있는 개울은 마을의 젖줄인 것이다. 예전에 '배달의 기수'란 TV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왕골마을은 단골 촬영장소다. 방앗간을 보면 전쟁영화의 한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현재 마을 곳곳에 한창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왕곡마을은 효자마을이다. 효자각이 2개나 보인다. 효자각 초석엔 금강저처럼 생긴 문양이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집구조도 특이하다. 주로 추운지방에 많이 나타나는 집구조라고 한다. 함경도, 동해안, 안동까지 이런 집을 볼 수 있다. 방이 겹으로 배열되어 있고, 외양간, 부엌, 곳간등이 몸채 안에 붙어 있는 건물이다. 그러나 암만 추워도 마당켠에 놓여 있는 장작더미만 보아도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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